일부 주민 문제 제기에도 아파트·업체는 서로 책임 전가 급급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 김 아무개씨(32·여)는 휴가를 보내던 중 아파트 동장의 연락을 받았다. 무인택배보관함이 꽉 찼으니 ‘장기보관’ 상태인 김씨의 택배를 빨리 수령해가라는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김씨는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빼달라고 하겠다”고 답했지만, 전화를 끊고 난 뒤 자신의 집이 빈집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같아 찜찜했다.

아파트 무인택배보관함의 ‘장기보관’ 표시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일어 논란이 되고 있다. 동·호수와 함께 ‘장기보관’ 문구가 안내되는 탓에 빈집털이 등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일부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아파트 측과 업체 측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장기보관 표시의 문제는 원치 않는 타인에게 자신의 집주소가 알려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무인택배함은 택배 보관을 LCD(액정표시장치) 화면 동·호수 표시를 통해 안내한다. 48시간 이내에 택배를 찾아가지 않을 경우 동·호수 밑에 ‘장기보관’ 이라고 표시된다. 이를 보고 어떤 가구가 집을 오래 비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빈집털이 등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서울시 강서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박 아무개씨(46·여)는 “흉흉한 일도 많이 일어나는데, 집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사람이 있겠냐”면서 “굳이 위험하게 동·호수와 장기보관을 안내하는 것 보단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지만 아파트 측과 업체 측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문제 제기된 아파트의 관계자는 “일부 주민이 문제 제기를 했기에 업체에 개선을 요구했으나, 아직 제대로 된 답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무인택배보관함 업체는 아파트 측이 비용·관리의 효율성 등을 이유로 지금의 무인택배함을 원했으며, 현재 제품의 시스템을 당장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무인택배함 설치 의무화를 추진했던 행정안전부는 이같은 지적에 대해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행안부는 지난 2014년 ‘가정방문서비스 안전대책’을 통해 500세대 이상 거주하는 공동주택에 무인택배함 설치 의무화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운영 상 노출되는 부분이라, (불편을 느끼는 아파트 주민들이) 업체에 개선을 요청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관련 기준이나 법령같은 건 없다”며 “사생활 보호와 크게 관련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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