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판정을 받은 아홉 살 아들이 갑자기 생존율 5%의 희귀암 판정을 받았다면? 상상으로라도 감히그 슬픔과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까. 극한의 엄마 수업을 받으면서 비로소 ‘행복한 60점 엄마’ 되는 법을 깨달은 선배맘 김경림을 만났다.

사진 이성우

얼마 전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어느 날 느닷없이 닥쳐온 큰아이의 암 진단에서 부터 건강을 되찾기까지 10년간의 투병 기록이자 ‘마음공부’ 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김경림은 육아지 기자로 일하며 결혼 전부터 이미 미래 육아에 대해 거의 완벽한 준비를 해두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아이의 능력을 최대치로 키워 주는 엄마가 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어요. 엄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결정된다거나 결정적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요.”

 

아마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그녀 역시 그동안 취재했던 육아·사교육 전문가들의 조언처럼 결정적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두 아이를 데리고 대치동 학원가를 전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 못한 ‘별일’이 그녀에게 닥쳐왔다. 아홉 살큰아이가 어느 날 머리가 너무 아프다며 식은땀을 흘렸다.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기에 한 달여간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다 받은 진단은 소아암, 정확히는 뇌종양과 혈액암의 한 종류인 ‘중추신경계 림프 종’. 그 뒤 항암치료로 인한 입원과 퇴원, 완치와 재발이 10년 동안 이어 졌다. 다행히 그 아팠던 아이는 이제 스무 살이 됐고 형 발병 당시 28개월이었던 둘째는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이다.

 

마냥 행복했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그녀는 아이의 투병을 통해 실로 많은 걸 깨달았다. 엄마는 아이의 운명을 좌우할 힘이 없으며 아이가 제 운명을 견딜 때 그저 곁을 지켜주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 아무리 마음 졸이고 애를 태워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아이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엄마로서 해줄 수 없는 걸 포기하자 뜻밖의 평안이 찾아왔다. 1년간의 항암치료 후 온 가족이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 지리산으로 이사를 감행한 것도 아이가 원하는 일이고 엄마인 그녀가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 아니 부모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걸 배운 것도 기나긴 병원 생활을 통해서다.

“아이가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시력을 잃었을 때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 마, 이 게임 정말 재미있어. 나는 병에 걸려서 시력을 잃었지만 게임을 얻었어. 병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엄마는 게임 못하게 했을 거 아냐?”라 고요. 저는 아이를 보며 불안에 떨었지만 아이는 몸의 장애와 상관없이 삶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던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내키는 대로 엄마 노릇을 해왔다고 말한 다. 병원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진료 스케줄을 조정했 고, 어떤 때는 며칠간 집안일에 일절 손대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있기도 했다. 그러면 어떤가. 그렇게 키운 두 아이가 그녀더러 ‘좋은 엄마’는 모르겠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엄마’라고 기꺼이 말해주니 그거로 된 거지. 애초에 세상이 요구하는 엄마 역할을 완벽히 해내려고 해봐야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러니 너무 힘 빼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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