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아름답고 공기 끝내줘…명절이면 고향 생각 말도 못하게 나”

이명승 어르신. 배경은 금강산이다. / 사진=이준영 기자, 이미지=조현경 디자이너

“죽기 전에 내 고향 금강산에 한번 가보고 싶어. 내 고향은 아름답고 공기가 끝내줘. 명절이면 고향 생각이 말도 못하게 나.”

광복 세달 전 1945년 5월 강원도 회양군 말휘리 111번지. 여기는 금강산에서 전동차로 한 정거장 거리다. 여기에 당시 10살이었던 이명승 씨(83세)가 어머니와 아버지, 두 형과 함께 살았다.

광복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강원도 회양군 전역은 38도선 이북 지역이 됐다. 6·25전쟁 이후 강원도 일부 지역은 남한 땅이 됐으나 회양군은 여전히 휴전선 북쪽에 위치한다.

회양군은 아름다운 산 옆에 위치해 있다. 회양군 동쪽에는 금강산맥이 뻗어 있다. 금강산, 우동산, 오봉산 등이 있다.


이 씨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회양군 말휘리는 강원도 두메산골이었다. 참 좋았다. 마을에는 금강산에서 내려온 물이 흘렀다. 그 물이 철원으로 내려간다. 금강산까지 운행하는 전동차가 있었는데 마을에서 금강산까지 한 정거장 거리였다.”

그는 “말휘리는 공기가 참 끝내주고 아름다웠다”며 “광복 전에는 일본에 침략 당한 때라 먹고 살기 힘들었다. 감자와 옥수수가 주식이었다”고 말했다.

이 씨 가족은 광복 세 달 전 고향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께서 한의사여서 소식이 밝았다. 당시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에서 인민군을 조직하려 했다. 아버지께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못 산다는 생각으로 가족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 씨 가족이 자리를 잡은 곳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이다. 이 곳은 이 씨 가족 말고도 많은 실향민과 피난민들이 살고 있다. 이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먹을 게 참 없던 시대였다. 삼형제가 먹을 게 없어 산에 올라 산딸기와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놀았다. 어머니는 재봉틀 남은 일부를 팔아서 보리쌀을 사서 가족들에게 죽을 해먹였다.”

이 씨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온 세 달 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이 왔다. 이 씨는 “해방이 되니 많은 한국인들이 거리로 나와 일본인들에게 떠나라고 외쳤다. 일본인들은 귀중품만 챙겨 집을 버리고 떠나기 바빴다”고 말했다.

광복 된지 얼마 후 이명승 씨 가족은 작은 아버지가 있는 인천으로 이사 갔다. 그리고 얼마 후 6.25전쟁이 터졌다.

이 씨는 전쟁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6.25전쟁이 터지자 가족들은 경기도 부평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는 산골짜기여서 북한군이 많이 오지 않았다. 이후 인천으로 돌아왔는데 1951년 ‘1.4 후퇴’ 때문에 인천 아래 지역으로 또 피난을 갔다. 거기서 총을 든 중공군을 직접 만났다. 땅 속에 묻은 빈 김치 장독대에 숨어있었다. 걸리면 죽는 거였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

그는 “6.25 전쟁 때 큰 형은 경찰로 들어가서 기관총 사수를 했다. 작은 형은 부평 탱크부대에서 있었다. 둘 다 모두 무사했다”고 말했다.

휴전 후 이 씨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에 대해 “인천 미군 부대에 찾아가 철조망 앞에서 ‘헬로우 런드리(세탁)’라고 외쳤다. 그러면 미군이 와서 ‘유 헝그리?(너 배고파?)’라며 쵸콜렛과 함께 세탁할 옷과 비누를 줬다”고 떠올렸다.

이 씨는 20일 이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정상회담을 본 후 고향 방문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고향에 가보고 싶다. 동물도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고향 쪽으로 누워 죽는다. 사람이라고 안 그렇겠는가. 부모, 형제도 돌아가시기 전 고향에 가고 싶어 했다. 얼른 핵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곧 추석이다. 고향 생각이 말도 못하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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