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횡령→처벌불원·피해회복→감형…‘기계적 감형’ 국민 눈높이에 안 맞아

기자의 책상 서랍에는 오랫동안 쓰지 않은 USB 한 개가 있다. 수년 전 재직했던 회사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갑작스러운 퇴사로 반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물건이 그렇게 애물단지다. 불쾌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내 소유가 아닌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다. 법을 다루는 검찰과 법원을 취재하다 보니 종종 ‘내가 회사 물건을 횡령한 게 아닌가’ ‘처벌받을 수도 있을까’라는 잡념에 빠지기도 한다.

소심한 기자가 보기에 법정에 선 재벌들은 대범(?)하다. 회삿돈 몇억을 빼돌리는 일은 예삿일도 아니다. 수십에서 수백억, 수천억원을 횡령·배임한 기업가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몇억은 “겨우”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숫자 개념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법이 그렇다’라는 논리로 뇌를 마비시키고 있지만, USB 하나에 벌벌 떠는 일반인 시각에선 수십억 이상 횡령·배임 혐의를 받는 재벌들이 집행유예로 실형을 피하는 현실이 납득될리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통칭되는 대표적인 사법불신 대상범죄는 대기업 관련 횡령·배임 범죄다. 최근 효성그룹의 조현준 회장은 16억원의 회삿돈을 사적으로 사용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음에도,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의 횡령·배임 범죄는 기본 2년~5년의 형을 선고하도록 한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기준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조 회장이 감형 받은 배경은 무엇일까? 법원은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조 회장이 피해자 ㈜효성에 횡령금액 전부를 갚았고, ㈜효성은 피고인에 대한 처벌불원의사를 표시한 점, 사후 조치를 통해서나마 ㈜효성과 그 주주 및 회사 채권자들이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사라진 점,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또 다른 업무상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돈을 갚고 회사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또 감형받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인 3명을 직원으로 허위 등재해 월급을 준 혐의가 있다.

‘딴 세상 이야기’ 같은 판결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 과거 김준기 전 동부그룹 회장(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취득한 주식을 모두 회사에 반환, 징역 2년·집유 3년)과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횡령금 전액을 각 회사로 반환, 징역 3년·집유 5년),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범행 이후 대부분의 피해를 회복한 점, 징역 3년·집유 5년)이 검찰 수사 이후 기업 손실을 보전하려고 노력했다는 이유로 낮은 처벌을 받는 전례가 있다.

법조계와 산업계 최고 이슈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사건도 이 같은 ‘공식’이 적용됐다. 이재용 2심은 이 부회장의 특정경제범죄법 위반(횡령) 혐의 부분에서 특별감경인자로 삼성전자의 ‘처벌불원’을 적용했다. 이 부회장은 1심에서도 횡령액 81억원(2심에서 인정된 횡령액은 36억이다)을 모두 변제했다는 이유로 감형 받았다. 이 부회장 2심이 유죄로 판단한 횡령 범죄액은 36억원으로 법정형이 2~5년이지만, 이 같은 감경사유 적용으로 실제 적용된 권고형은 1년 6개월~3년으로 줄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던 배경도 복합적이지만 재벌의 횡령·배임 양형 ‘공식’이 적용된 것이다.

법을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양형기준안에서 ‘피해자 처벌불원(합의)’을 특별 감경인자와 집행유예의 주요 참작 사유로 정하고 있다. 문제는 재벌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기계적으로 감형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배주주와 주요 경영진에 의해 경영이 이뤄지는 우리나라의 기업 특성상, 회사가 오너의 처벌을 바라는 일은 매우 드물 것이다. 오히려 모든 이사회가 지배주주와 주요 경영진에 대해 기계적으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청기업 입장에서는 모 회사의 오너의 신병문제가 회사의 존립과 직결되면서 처벌불원 탄원서를 작성할 개연성도 높다. 우려가 아니고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더욱이 재력가가 횡령액을 변제하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대기업 지배주주와 주요경영진의 배임·횡령 범죄에서 감경인자로 ‘처벌불원·피해회복’을 적용하는 대법원 양형위원회 처벌기준은 개선돼야 한다. 현행 감경사유가 유지된다면 경영진의 배임·횡령 범죄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피해회복을 위한 자산만 있으면 실형을 피할 수 있다는 왜곡된 인식도 커질 것이다. 소심한 국민들의 눈높이까지 맞출 수 있는 처벌이 이뤄져야 사법부가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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