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는 성장세 둔화 우려도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 이미지=김태길 디자이너
최근 게임업계 노조 설립이 잇따르고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이번 노조 설립을 계기로 ‘포괄임금제’, ‘크런치모드’ 등 업계 관행이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노동환경 개선 과정에서 게임산업 성장세가 둔화될까 우려하는 모습도 나오고 있다.

국내 게임업계의 근로시간은 가히 살인적이다. 게임업계에서 야근은 일상이다. 대형 게임업체 사옥에는 대부분 수면실과 샤워실이 마련돼 있다. 일부 업체들은 직원들에게 컵라면과 커피를 무제한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보자면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야근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임업체에 근무하는 개발자들은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대부분 고된 업무에 시달린다. 게임의 경우 실시간으로 유저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하기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특히 대규모 업데이트 일정이라도 잡히면 개발자들은 집에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한다. 게임업체가 밀집해 있는 구로와 판교에는 과거 ‘등대’라 불리는 업체들도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사무실 불을 밝히면서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는 자조(自嘲) 섞인 별명이다.

◇넥슨·스마일게이트, 노조 설립…포괄임금제 폐지 등 주장

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3일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산하 넥슨 지회(넥슨 노조)는 설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크런치모드를 워라밸모드(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근무체제)로 바꾸기 위해 게임업계 제1호 노조를 세운다”고 밝혔다.

넥슨 노조는 “국내 게임산업은 시장규모 12조원대로 급성장했지만 정작 게임을 설계하고 만드는 게임업계 노동자들의 처지는 매우 열악하다”며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야근이 공짜가 됐고 빈번해진 크런치모드로 장시간노동의 과로는 일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포괄임금제란 연장·야간근로 등 시간외근로에 대한 수당을 급여에 포함시켜 일괄지급하는 임금제도다. 노동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사업장에서 일정 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도입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업체들이 포괄임금제를 야근수당을 주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크런치 모드’라 불리는 집중 근무제도가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크런치 모드는 게임 출시 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집중 근무 형태를 가리키는 업계 용어다. 특히 개발 주기가 짧은 모바일게임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크런치 모드가 더욱 자주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크런치 모드가 무분별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현재 대다수 업체들은 크런치 모드라는 명분하에 직원들에게 야근을 강요하고 있다.

넥슨에 이어 스마일게이트에서도 노조가 설립됐다.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SG길드’는 지난 5일 ‘노동조합설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출범을 밝혔다. 스일게이트 노조는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개발자에게만 전가하고 (프로젝트가) 접히면 이직을 강요당하는 불합리한 상황”이라며 “인센티브만큼 연봉이 깎여서 입사하고 함께 이뤄낸 성과를 극소수가 독식하는 구조를 바꿔야한다”고 설립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넥슨과 스마일게이트 두 노조는 포괄임금제 폐지와 크런치모드 개선을 공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다른 게임사들도 노조 설립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게임사들은 포괄임금제 폐지 등 노동환경 개선과 관련해 강한 압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노조 설립과 관련해 대부분 환영한다는 반응이다. 그동안 열악한 근무환경속에서 고통받아왔던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근로여건이 개선되길 기대하고 있다.

한 게임개발자는 “게임이 좋아서 이쪽 업계에 뛰어들었지만, 고된 업무로 인해 정작 게임할 시간이 나지 않는다”며 “이번 노조 설립을 계기로 포괄임금제 대신 유연근무제가 자리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성장세 둔화 ‘우려’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동환경 개선 과정에서 게임산업 성장세가 둔화될까 우려하는 모습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정부가 지난 7월 300인 이상 사업장에 주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넥슨, 넷마블, 엔씨소프트 등 대형 게임사들의 신작 출시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신작 출시가 불투명해지자 게임사들의 매출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무섭게 성장한 중국 게임사들이 국내 시장에 속속 들어오면서 국내 게임사들의 입지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게임시장 1위 넥슨의 2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전분기 대비 매출은 47%, 영업이익은 71%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왔던 넷마블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넷마블은 전년대비 2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7.3%, 40.8% 감소했다. 모바일게임 ‘리니지M’의 성공으로 창사이래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엔씨소프트도 2분기 부진을 피해가지 못했다. 엔씨 역시 지난 1분기와 비교해 매출은 8%, 영업이익은 2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업계 고위 관계자는 “중국의 경우 24시간 2교대로 게임을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이 2~3년에 걸쳐 만들 게임을 중국은 1년이면 만든다.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선 체계적인 업무시스템이 필요한데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현재 대형 게임사들은 줄어든 근무시간에 맞춰 업무 시스템을 재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분간 성장세 둔화는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을 받지 않는 300인 미만 게임사들의 경우 중국 게임의 공습 등으로 생존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환경 개선 등은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노조 설립은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며 “이번 노조 설립을 계기로 게임업계 전반적으로 근로 환경이 개선되길 기대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개발 속도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사측과 노조측이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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