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국고손실 인식했다고 볼 수 없고, 뇌물공여자 진술 신빙성 없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과 손잡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뒷조사하는 비밀공작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이현동 전 국세청장이 지난 2월 12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과 공모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뒷조사를 돕고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현동 전 국세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이 전 청장은 8일 석방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조의연 부장판사)는 이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등손실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청장의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전 청장이 국정원의 정치적 의도를 인식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공작자금 전달 행위를 국고손실로 볼 수 없고, 뇌물수수와 관련된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도 신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고손실 혐의와 관련해 “피고인이 국정원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했거나 국정원과 이를 협의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피고인은 해외 정보원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봐야 한다”면서 “피고인이 국정원과 공모해 전 과정에 가담했다거나 국고손실을 인식했다고 볼 수 없어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서도 “피고인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승연 전 국정원 대북공작국장,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 등의 진술은 믿기 어렵거나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면서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인정하기 어려워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전 청장의 혐의 외에도 국정원 공작 활동이 직무범위를 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국정원에 수집된 정보를 종합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비자금 존재 여부는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 상태였다”면서 “‘DJ 비자금이 북으로 송금 될 수 있다’라는 소문은 대북 관련성이 있고, 국정원 입장에서는 그 실체파악이 필요하다고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

무죄가 선고된 직후 법정을 가득 메운 이 전 청장의 관계자들은 박수를 터트렸다. 일부 관계자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 전 청장은 재판부를 향해 인사한 뒤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퇴정했다. 그는 이날 무죄 판결로 석방된다.

이 전 청장은 재임 시기인 2010년 5월부터 2012년 3월까지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국정원 직원과 공모해 해외 정보원에게 김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을 추적하는 비용을 지급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등손실)로 지난 3월 2일 구속기소됐다.

이 전 청장이 ‘데이비슨 프로젝트’로 알려진 DJ비자금 소문 추적 작업 과정에서 해외정보원에게 14회에 걸쳐 총 5억3500만원과 미화 5만 달러(약 5400만원)를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전 청장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 청와대 파견근무 경력 등을 이유로 국세청 내에서 ‘실세’로 통했는데, 국정원과 국세청 역외탈세 담당 간부들이 이 전 청장을 매개로 김 전 대통령 및 주변 인물의 현금 흐름 등을 조직적으로 추적한 사실이 확인됐다는게 검찰 측 주장이다.

국정원과 국세청은 미국 국세청(IRS)의 한국계 직원에게 거액을 주고 정보를 빼내오는 등 2년여 동안 김 전 대통령의 비자금 풍문을 다각도로 검증했으나, 결국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이 전 청장은 이 혐의와 별도로 2011년 9월 국세청장 접견실에서 DJ비자금 추적 지시를 받은 김승연 전 국정원 대북공작국장으로부터 ‘비자금 추적 진행 상황’을 브리핑 받고 활동자금 명목으로 1억2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도 함께 받는다.

한편, 이 전 청장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을 받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지난 5월 15일 국고손실, 뇌물공여 등 혐의로 기소됐다.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으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된 이후 추가 기소된 것이다. 원 전 원장은 지난 2010년 5월부터 2012년 4월까지 김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 의혹을 뒷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대북공작금 5억여 원을 유용한 혐의를 받는다.

국정원 최종흡 전 3차장과 김승연 전 대북공작국장도 대북 특수공작비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뒷조사에 쓴 혐의로 지난 2월 19일 각각 구속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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