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지연’ 김기춘 사례만 문제 아냐…상고제도 개선 논의, ‘재판거래’ 의혹으로 위축될까 우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6일 석방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지난해 1월 21일 구속된 지 562일만이다.

석방의 직접적인 원인은 ‘재판지연’이다. 김 전 실장은 1·2심에서 징역 3~4년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이 미뤄지면서 풀려났다. 형사소송법상 최대 구속기한인 1년 6개월이 지난 탓이다.

법원은 김 전 실장의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면서, 구속만기일인 8월 6일까지 이 사건 판결을 선고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국정농단 사건 재판 장기화에 따라 석방된 피고인 수는 5명으로 늘었다.

김 전 실장의 석방 사례는 우리나라 상고제도의 문제점을 살펴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대법관 업무 가중에 따른 재판지연 등 상고제도 개선을 둘러싼 오래된 법조계 논의와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먼저 전원합의체는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 전원이 함께 심리하는 재판 제도다. 대법원 판결은 통상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심리되는데, 재판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전원합의체로 사건을 넘겨 심리할 수 있다. 사건이 매우 복잡하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에도 전원합의체 판결이 이뤄진다.

전원합의체 심리는 이례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상고심은 전원합의체 심리가 ‘원칙’이다. 법원조직법 제7조는 ‘대법원의 심판권을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의 합의체가 행사한다’고 규정하면서 대법관 3명 이상으로 구성된 부(部)에서 먼저 심리 할 수 있도록 했다. 소부 심리가 ‘변칙’인 셈이다.


원칙이 아닌 변칙으로 상고심 심리가 이뤄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다. 통상 대법관 1명이 연간 3000건에 달하는 상고 사건을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심리할 경우 처리할 재판이 쌓이는 ‘재판 적체 현상​이 심화된다. 대법관이 사건을 들여다볼 시간이 줄어들수록 제대로 된 상고심 심리가 이뤄질 가능성도 작아진다.

 

대법관의 업무 부담을 줄여주고 상고심 심리를 충실하기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고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필연적으로 발생했고, 이러한 요구는 ‘​상고법원 신설’​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가 되기도 했다. 교통범칙금 사건까지 대법원이 처리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가치관 형성, 법령기준 제시 등 대법원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는 자성을 목소리었다.

 

상고법원 신설을 반대하는 입장에선 대법관을 증원하고, 상고허가제(1981~1990)를 다시 도입하자는 식의 대안도 나왔지만, ‘대법관의 업무를 줄여 상고심 심리를 충실히 해야 한다’라는 대전제에서는 큰 이견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는 최근 악재를 만났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그것이다.
 

사법부가 상고법원 신설을 위해 입법부와 행정부에 각종 로비를 기획했고, 재판을 로비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정황은 모든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3권 분립을 팽개친 반헌법적행위가 대법원 주도도 발생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드러난 정황만으로도 재판의 외관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분명 ​이번 사건에 대한 도덕적·법률적 책임은 누군가가 질 것이고 그래야 하지만,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와 권위를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이번 사건으로 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건전한 논의조차 불경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이다. 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발전적 논의가 ‘재판거래’ 의혹으로 위축되거나 물 건너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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