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들 묵인 내지는 공조…신뢰 잃은 대법원 판결 납득할 국민 없어”

 
지난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고영한·김창석·김신 대법관 퇴임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판거래 및 법관사찰 등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물밀 듯 쏟아져 나오면서, 대법관들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개된 문건 내용만으로도 대법관들의 묵인 내지는 공조가 확인됐고, 신뢰를 상실한 대법원의 판결이 더 이상 정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외압 없는 검찰 수사와 진상규명을 위해서라도 대법관들의 용퇴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재직한 대법관들에 대한 사퇴 요구는 시민사회 단체와 변호사 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지난달 31일 법원행정처가 비공개 문건을 추가로 공개하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참여연대는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 문건을 근거로 대법관들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문건에 따르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전교조 법외노조, 통상임금 사건, 과거사 국가배상, 쌍용차 정리해고, KTX 승무원 해고 사건 등은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재판거래 사례로 명시돼 있다.

참여연대 측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법원 판결이 내려져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사안들”이라며 “대법원 스스로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왜곡된 판결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확인된 상황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고 납득할 국민이 어디 있겠냐”고 주장했다.

국내 최대 변호사단체인 대한변호사협회(변협)는 법원행정처가 ‘형사 성공보수 약정 무효’ 판결을 통해 대한변협을 압박하려 했다는 문건을 근거로, 당시 판결에 관여한 대법관들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앞서 검찰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이동식저장장치)에서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에 반대하던 변협을 압박하기 위해 변호사 성공보수 소송의 결론을 미리 내놓고 재판을 기획했다는 정황이 담긴 문건이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변협은 “대법원이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 판결의 내용을 미리 기획해 선고했다는 것으로 법치주의 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형사 성공보수 무효 판결에 법관의 양심에 어긋나게 참여한 대법관들은 사법의 독립과 신뢰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고 더 이상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형사사건 성공보수는 정당한 노력의 대가이므로 합법이고, 다만 지나치게 과도할 때 불공정한 법률행위로 무효가 될 수 있을 뿐”이라며 “해당 전원합의체 판결에 관여한 대법관들의 사퇴를 촉구한다”고 비판했다.

대한변협 재무·공보이사 등을 지낸 이율 변호사는 형사사건 성공보수 무효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헌법소원까지 제기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규탄 전국변호사 비상 모임’은 지난 6월 11일 서초동 가두행진을 통해 관련 대법관 전원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의 성명에는 전국 변호사 2000여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권력으로부터 독립돼 공정하게 재판을 수행한다는 사법권의 독립을 사법부 스스로 훼손하고 무너뜨렸다”며 “이로 인해 변호사의 변론권 마저 처참하게 무력화됐고 일반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고 비판했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온오프라인을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법관들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박 교수는 최근 게시한 SNS 글에서 “양승태 대법관들은 사법농단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들은 양승태가 무리하게 추진하는 상고법원 설립을 막기는커녕 철저히 동조했다”면서 “대법관들 몇 명이라도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법원장과 행정처장의 불법부당한 일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농단사태가 일어났겠는가. 아무리 변명을 한들 그들과 양승태는 공범관계임을 부정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대법원은 사법정의의 최후의 보루인데 그곳이 국민들로부터 결정적으로 불신을 당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나타난 사실만 가지고서도, 국민은 당장이라도 대법관들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실규명을 위한 수사가 지지부진한 원인으로 대법원이 수사를 방해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진상규명과 사태해결을 위해 특별법과 특별재판부를 구성해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일의 선후를 고려했을 때 양승태 대법관들이 사퇴해야 맞다고 강조했다.

 

한편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 수사는 법원의 비협조로 거북이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하드디스크는 디가우징(강력한 자력에 의한 데이터 삭제 기술)로 훼손돼 복구가 불가능해 졌고, 관련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줄줄이 기각되면서다.

검찰은 이날 오전 양승태 사법부가 일제 강제동원·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을 놓고 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외교부를 압수수색했지만, 정작 법원행정처 국제심의관실과 소송 관련 문건 작성에 관여한 전·현직 판사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기각돼 수사하지 못했다.

검찰에 따르면 법원은 “(관련 자료의) 임의제출 가능성이 있고, 문건 내용은 부적절하나 대한민국 대법관이 일개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라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지난달 27일에도 법관사찰 및 징계무마 사건과 관련해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인사심의관실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가 시작된 이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제외한 모든 전·현직 법관들과 법원행정처 실·국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진상규명을 위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강조하면서도, 재판거래 및 사법행정권 남용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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