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당국 눈치 보기에 "비용 늘어도 일단 채용하자" 확산 중

“한 번에 많은 인원을 채용하면 차후 은행에 인력 구조 문제가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 대규모로 들어온 신입 행원은 팀장 등 관리자급이 된다. 그럼 은행의 인력구조는 관리자급이 많아지는 항아리형이 된다. 인건비 등 비용 문제가 우려된다. 현재 은행권은 이런 문제가 예상됨에도 채용비리 의혹을 벗고 일자리 창출 정책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금융 현실에 맞지 않는 채용을 하고 있다."

한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올해 하반기 대규모 은행 신입사원 채용과 관련해 이 같은 우려를 나타냈다. 상반기에 채용비리를 일으킨 은행권이 일제히 대규모 채용에 나선 것을 두고는 정권과 금융당국에 눈치 보기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금융권의 변화 가운데 하나로 인력 축소와 비용 절감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지만 은행권이 스스로 이 변화에 역행한다는 비판했다. 은행의 자율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 19일 우리은행은 올해 그룹 전체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1018명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전체 신입사원 채용 규모보다 23%(191명) 늘었다. KEB하나은행은 하반기에 약 400~500명 수준의 신입행원 공채를 한다. 지난해 하반기보다 최대 두 배로 신규 채용을 늘린다. KB국민은행은 하반기에 은행 직원 총 600명을 채용한다. 지난해보다 100여명 더 늘었다.

신한은행도 하반기 공채를 실시해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인 450명 정도를 선발할 계획이다. NH농협은행도 하반기에 지난해 수준인 150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상반기에 이미 350명을 선발했다. 이에 5대 은행이 올해 뽑게 되는 신입 행원은 최대 3000명이 넘는다. 작년 2145명보다 900여명(40%) 증가한 수준이다.

문제는 왜 이렇게 많이 뽑느냐다. 5대 은행들은 매년 인력을 줄이고 있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5대 은행 총임직원 수는 7만1968명이다. 1년 전보다 4841명(6.3%) 줄었다. 2016년 말에도 은행 총임직원은 그 전년보다 2038명(2.6%) 감소했다. 2년 동안 은행원은 6879명(8.7%) 줄어들었다.

이렇게 인력을 줄여온 덕에 5대은행의 판매관리비는 지난해 12월 말 15조3106억원을 기록했다. 1년 전보다 1.9%(2928억원) 감소했다. 하지만 5대 은행이 올해 동시에 대규모 채용에 나서면서 이 비용은 다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의 대규모 채용은 최근의 금융 디지털화와 비대면 금융서비스 확대, 이로 인한 점포 축소와 어울리지 않는 경영 선택일 수 있다. 올해 뽑은 대규모 인력은 비용만 아니라 지점 배치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중복 인력이 같은 지점에 배치돼 비효율성이 커질 우려가 높다는 게 은행원들 생각이다.

인력을 이렇게 뽑고 있는데도 5대 은행에선 희망퇴직과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고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희망퇴직자를 늘려서라도 신규채용에 나서라고 주문하지만 은행들은 인위적 희망퇴직은 은행의 고급인력을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또 퇴직금 마련이 비용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전한다. 결국 올해 은행권은 인력이 많아지고 비용이 커지는 등 비효율성이 커지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번 은행권 채용은 은행들의 경직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은행 산업은 규제 산업이라고 한다. 금융당국의 힘이 셀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신은 규제보다 경영 자율이 담보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 은행들은 채용 결정에서부터 경영상의 자유가 없어 보인다. ‘권력에 눈치 보기’는 금융권 혁신에 불필요한 요소다. 금융을 망치는 지름길일 수 있다. 지금은 은행권이 그 지름길을 걷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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