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우징 및 자료제출 거부…수사 대상자들은 텔레그램 ‘망명’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 사진=뉴스1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직권남용 의혹이 뚜렷한데도 행정처는 검찰 수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드디스크 디가우징 및 자료 미제출 등 행정처의 수사대응 방법이 사법 불신을 자초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최근 행정처와 자료 제출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장(2016~2017년)인 고영한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제출을 요구했으나, 법원은 현직 대법관의 PC는 법원행정처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8월 2일 퇴임 전엔 확보해 제출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행정처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정다주 전 기획조정심의관의 하드디스크를 제출해달라는 검찰의 요구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행정처 차장을 지낸 고 대법관의 하드디스크와 함께 기획조정실장-행정처 차장-행정처장으로 이어지는 기획조정실 라인이 주고받은 문건을 확인하겠다는 입장이다. 

 

기조실은 대외 업무 등을 도맡아 민감한 내용의 문건이 다수 작성될 것으로 의심되는 곳이다. 검찰은 하드디스크 외에도 대법관들의 관용차 운행일지, 법인카드 사용 내역 등을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행정처는 자체 조사 결과 의혹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분류한 410개 문건 파일을 원본 형태로만 제출했다. 공식적으론 수사와 관련 없는 파일이 유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사법부가 수사 대상이 된 초유의 사태에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하는 모양새다.

이에 앞서 검찰은 의혹의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하드디스크도 행정처에 요청했으나, 행정처는 이 하드디스크 등이 ‘디가우징’(Degaussing, 강력한 자력을 이용한 파일 영구 삭제) 됐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행정처는 디가우징 배경과 관련해 “대법관·대법원장이 사용한 컴퓨터는 그 직무 특성상 임의로 재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용할 수 없는 장비’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완전 소거 조치를 위해 디가우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뒤늦게 해당 디가우징을 양 전 대법원장 본인이 직접 지시했음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커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묵인 아래 디가우징이 이뤄진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 상태다. 양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 된 시점은 김 대법원장 취임 이후 대법원 자체조사 시점에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9월 22일 퇴임한 양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는 약 한 달 뒤인 10월 31일 디가우징됐다. 10월 31일은 양 전 대법원장이 이끌던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1차 조사가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라 2차 자체 조사를 앞둔 시점이다.

당시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25일 출근길에서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했고, 실제 11월 3일 추가조사를 지시했다. 시간의 흐름상 김 대법원장은 디가우징 시점 한 달 전에 사안의 시급성을 언급했지만, 디가우징이 있고 나서 나흘이 지나서야 추가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수사 대상에 오른 전 행정처 법관들이 ‘입 맞추기’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양 전 대법원장 등 전 행정처 법관들이 줄줄이 텔레그램 메신저에 가입하면서다. 러시아 프로그래머가 만든 텔레그램은 2014년 검찰의 ‘카카오톡 사찰’ 논란과 2016년 테러방지법 국회 통과 이후 ‘망명’ 이 급증한 메신저다. 국내 메신저보다 보안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이 사용하는 휴대전화 전화번호가 지난 3일 텔레그램에 가입했다. 한승 전주지법원장(지난 7일), 심준보 전 사법정책실장(지난 22일), 김현보 전 윤리감사관(지난달 24일), 김문수 전 행정처 기획 1·2심의관(3일)도 각각 텔레그램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의 경우 개인정보가 국가기관에 유출되는 것을 우려하고, 공무원의 경우 수사 정보나 민감한 정부 자료 등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텔레그램 망명을 선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제한적으로 제공된 문건만으로 검찰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실체를 밝혀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면서 “수사 협조에 미온적인 행정처의 태도는 국민들에게 ‘사법부가 잘못을 은폐한다’라는 의심을 품게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재경지법 한 판사는 “법원 내부에는 ‘사법신뢰 회복을 위해 적극 수사에 협조하자’라는 의견과, ‘검찰 수사로 사법신뢰가 더 훼손됐다’라는 의견이 공존하는 것 같다”면서 “양측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다 보니 애매한 수사협조 태도가 나오는 것 같다”라고 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행정처의 자료 제출 거부가 계속될 경우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가 이뤄질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반면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구체적인 혐의도 확정하지 않은채 모든 자료를 다 달라는 검찰의 태도는 속된말로 법원을 털어보겠다라는 생각으로 읽힌다면서 검찰이 유리한 여론을 통해 무리한 요구를 하고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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