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열 우리銀 개성지점장 “개성공단 열리면 내일이라도 영업 가능하다”

북한 개성에서 운영한 우리은행 개성지점 모습. 우리은행 측은 북한에서도 한국의 언론 모니터링이 이뤄져 최호열 지점장의 사진은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 사진=우리은행 제공

개성공단 우리은행 지점은 일종의 사랑방이었다.”


최호열 우리은행 개성지점장은 개성지점을 이렇게 떠올렸다. 당시 개성공단에 상주한 사람들에게 우리은행 지점은 ‘남한 스타일’로 꾸며진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래봐야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행 지점의 형태였지만 공단 상주 직원들에게 의도치 않게 친근함과 편안함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은행 업무가 없어도 지점을 지나가다 들어와서 인사를 나눴고 차를 마시다 돌아갔다. 


최 지점장은 지금 서울 우리은행 본점 지하 1층에 있는 개성지점 임시 영업점에 있다. 그는 개성공단과 우리은행은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산망도 ‘개성 맞춤형 전산망’이다. 지금도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임시 영업점에서 업무를 본다. 혹은 일이 없어도 인사하러 온다. 임시 영업점도 여전히 사랑방처럼 운영된다.

최 지점장을 4일 개성지점 임시 영업점에서 만났다.

-2016년 2월 10일 개성공단이 전면폐쇄 된다는 정부 발표를 들었을 당시 상황은 어땠나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폐쇄가 나왔고 다음날 북한으로부터도 11일까지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연휴가 막 끝났을 때였다. 그래서 개성공단 안에 사람이 많이 없었다. 명절을 마치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인원이 제한됐다. 결국 짐을 싸고 싶어도 시간도 인력도 부족했던 것이다. 안에 있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 나와야 했다. 사실 전면폐쇄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상황을 보며 폐쇄가 장기화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개성공단이 폐쇄됐다고 개성지점을 없앨 순 없었다. 개성공단에서 철수한 기업들에 대한 사후관리도 필요하다. 전산망은 개성에서만 쓸 수 있는 전산망이다. 한국처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런 이유로 개성공단에서만 쓸 수 있는 별도의 전산망을 구축해야 했다. ​때문에 지금도 입주기업들이 금융 업무를 보려면 서울에 있는 개성지점에서 업무를 봐야한다. 이 말은 개성공단이 열리게 되면 우리은행은 당장 내일이라도 영업점을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지금이나 당시나 개성지점은 일종의 사랑방이다. 사람이 모이고 정보가 모인다. 개성지점 안의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차를 즐겼다. 개성지점은 한국에 있는 지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이 때문에 공단 상주 사람들에겐 익숙했을 것이다. 유일한 남한스타일의 공간이 우리은행이었다. 그래서 자주 왔던 것 같다. 지금도 입주 기업 관계자들이 서울에 오면 일이 없어도 인사하러 온다. 안부를 묻고 소식을 공유한다.


-개성지점에 북한 사람들과 같이 일했다. 불편하진 않았나

그렇진 않았다. 이력서를 보니까 회계와 경제를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개성에서 은행 업무 경험이 있는 직원도 있었다. 다만 손님이 모두 남한 기업 관계자들이다보니 처음엔 인사를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손님 얼굴도 못 쳐다봤고 전화가 와도 안 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는 은행이고 서비스 업종이기 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했다고 이야기해줬다.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한두 달 지나고 이런 문제들은 없어졌다.

 


-소통에 문제가 없었는지 

정치, 경제와 같은 예민한 문제에 대해선 서로가 묻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를 많이 나눴다. 한 번씩 남한에 갔다 오면 주말에 뭐했는지, 자녀는 몇인지 등 일상적인 것들을 물어보더라. 저도 거꾸로 그런 것들을 물어봤다. 그런 대화조차 없으면 업무 환경이 삭막했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일 없습네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필요 없다’, ‘신경 쓰지 마라’라는 말로 들려 당황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언짢았는데 알고 보니 북한에선 이 표현이 ‘괜찮습니다’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식당에 갔는데 메뉴에 낙지튀김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오징어만 나온 것이었다. 물어보니 북한에선 낙지와 오징어를 정반대 쓰고 있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이후 낙지가 적혀 있으면 오징어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언어의 표현들이 다른 것들이 있었다.

 


-공단에서 퇴근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소일거리가 없었을 텐데

개성공단 부지가 100만평가량 된다. 산책을 주로 했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핸드폰도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전화나 문자사용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주 직원들 사이에 동호회가 있었다. 축구, 테니스 등 동호회 활동이 많았다. 직원들과 저녁에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다. 숙소 안에 TV가 있어서 한국 방송들을 보기도 했다. 공단에서 나가려면 3일 전에 신고해야 했다.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나가는 시간대도 있어서 그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다시 3일을 기다렸다. 위급한 일이나 경조사로 인해 그날 나가야 하면 4~6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 바로 나가지 못한다는 걱정은 언제나 있었다.

 

 

우리은행 본점 지하 1층에 있는 개성지점 임시 영업점. / 사진=우리은행 제공

-북한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보고 느끼는 바도 컸을 텐데  

개성공단 초창기 개성공단 기본인금이 월 50달러였고 이후 수당까지 다 합쳐서 150달러가 넘었다. 공단 안에 한국 편의점이 있었다. 직원은 북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있는 물건들 품질이나 가격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도 1달러가 넘는다. 몇 가지 물건을 사도 10달러가 훌쩍 넘는 데 그 가격을 아무렇지 않게 사는 모습도 봤다. 북한 사람들 사이에 남한이 잘 산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을까. 옷차림, 차량, 쓰는 물건들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은행이 남북 금융협력 지원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북한의 비핵화와 정부의 계획을 보면서 우리은행도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F의 첫 번째 주안점은 개성지점 재입점이다.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금융지원을 하고 이산가족상봉·금강산관광 산업 재개에도 적극 참여할 방안을 세우고 있다. 개성공단 재입주가 되고 공단이 커지면 지점이 늘어날 수 있다. 그럼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의 금융기법 교육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개성공단은 단순한 공단이 아니다. 남북경제 협력의 장이자 평화의 장이다. 5만5000여명의 북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개성공단이 북한 내 10개만 생겨도 통일이 된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은행은 그 의미와 가능성을 봤다. 지금도 적자를 감수해서라도 개성지점을 유지하는 이유다. 언젠가 남북경제교류가 커지고 금융권이 북한에 진출할 때 개성지점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개성공단이 다시 열리는 것도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 경제 제재 완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공감대 안에서 단계적으로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개인적으로 개성공단이 올해 내로 열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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