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적 증거인멸’ 의혹…“치부 숨기려, 타당한 변명 아냐” 비판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뉴스1

재판거래와 법관사찰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중 사용하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복구할 수 없도록 삭제된 시점이 대법원의 자체조사가 한창 이뤄지던 무렵인 것으로 확인됐다. 대법원은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법조계 안팎에선 조직적인 ‘증거인멸’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27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22일 퇴임한 양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는 약 한 달 뒤인 10월 31일 ‘디가우징’(Degaussing) 됐다. 디가우징은 강력한 자력을 이용해 물리적으로 하드디스크 등에 저장된 정보를 복구할 수 없도록 지우는 기술이다.

대법원은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에 따라 퇴임자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들을 디가우징을 한 것으로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이 디가우징을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스스로 결정했고, 후임자인 김명수 현 대법원장이나 김소영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개입하지 않았다며 선을 그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산관리운영지침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 컴퓨터는 디가우징 처리 후 보관하고 있다”며 “이는 다른 대법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

또 “대법원장·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퇴임 시 해당 대법원장실과 대법관실에서 직접 처리를 지시하기 때문에 폐기 여부 결정에 대한 행정처 내에 별도의 결재선은 없다”면서 “대법관 이상의 경우 퇴직 때 하드디스크를 폐기처분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대법관실로부터 폐기를 요청을 받은 전산담당자는 이를 폐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대법원의 설명에도 디가우징 시점과 그 이유를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디가우징이 실시된 지난해 10월 31일은 양 전 대법원장이 이끌던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1차 조사가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라 2차 자체 조사를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

앞서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25일 출근길에서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했고, 실제 11월 3일 추가조사를 지시했다. 시간의 흐름상 김 대법원장은 디가우징 시점 한 달 전에 사안의 시급성을 언급했지만, 디가우징이 있은 뒤 나흘이 지나서야 추가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대한법학교수회 백원기 회장(국립인천대 교수)은 “법원 자체조사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고, 추가조사를 언급했음에도 디가우징이 있었다면 김 대법원장의 관여 또는 묵인이 있었다는 추정과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서 “국민 대부분은 ‘법원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 하드디스크를 지웠다’고 생각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백 회장은 나아가 “검찰이 강제수사를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면 거부할 것이냐”라고 반문하면서 “검찰은 실체적인 진실을 확인하게 위해 모든 자료를 확보할 권리가 있는데 현 대법원장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적극협조’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디가우징이 꼭 필요한 조처였는지에 대한 의심도 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법원이 근거로 제시한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 27조를 지적하며 “이 규정은 기술적으로 ‘사용불능’한 장비를 어떻게 한다는 것이지, 장비를 사용불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아니”라며 “다른 모든 법관들 컴퓨터는 (디가우징 없이) 후임 법관이 사용하는 것에 비춰 (절차상 문제가 없다라는 것을) 타당한 변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반면 재경지법 A판사는 “의도성이 있느냐가 가장 큰 쟁점이 될 것 같다. 현 상황에서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일반 국민의 시점에서 증거인멸로 보일 수는 있겠다”고 말했다. 

 

A판사는 또 “일선 판사들도 후임자에게 전달하기 곤란한 파일들을 지우기도 한다”면서 “전임 대법원장이 쓰던 하드디스크도 확실한 청소하기 위해 디가우징을 한 것이지, 사법행정권 논란과 연관된 특정 파일들을 지우기 위해 (디가우징을) 했거나 이를 묵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편 검찰은 수사기관이 자료를 적법하게 확보하지 않는 이상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을 들어 하드디스크 등을 제출해 달라는 재요청 의사를 밝혔다. 검찰은 지난 19일 양 전 대법원장과 행정처 관련자들의 업무용 컴퓨터 하드디스크 8개와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 등에 대한 자료 협조를 요청한 바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해 재판개입과 판사사찰을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지난달 25일 “양 전 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권에 우호적인 판결을 선별, 청와대와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는 문건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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