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자 차관’ 스윙 제도 역할 톡톡…지속 협력 위한 강한 리더십과 국민 지지 필요

분단 이후 동서독의 첫 번째 과제는 동서독 주민들 간 ‘심리적 거리 좁히기’였다. 서독은 도로와 철도, 수도, 우편, 통신 등을 연결하며 은 갈라져도 민족은 찢어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서로 공유했다. 언제 이뤄질지 모를 통일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우선 가깝고 친하게 지내자라는 인식이 양국에 넓게 퍼져있었다.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 연방재무부 전 차관은 서독 간 이뤄졌던 교통경제문화 교류 정책들은 결국 동서독 주민들을 정서적으로 가깝게 연결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다어떤 교류도 인간적인 소통을 가장 우선으로 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심화하기 시작한 동서독 경제격차는 그간의 정서교류경제교류라는 의미로 강제 치환했고, ‘교류는 점차 지원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동독 경제가 힘을 잃고 비실거리자 서독은 동서독을 잇는 인프라 투자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했다.

 

독일 베를린 외곽 드라이린덴 지역에서 찍은 고속도로 A115 사진. 고속도로 옆에 베를린 시내 진입구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특히 동독 경제가 지속적으로 악화하며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지자 동서독 간의 상품교역도 위기를 맞았다. 이에 서독은 이른바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차관 제도를 통해 동독 경제를 지원했고, 이를 통해 동독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서독의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이 항상 매끄럽게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서독 내부에서 동방정책을 펼친 당시 서독 총리 빌리브란트(서독 4대 총리1913~1992)가 ‘소련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또 동독 역시 서독의 지원을 반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각종 인프라 투자 비용 부담하며 교류 늘린 서독

 

분단 이후 서독의 가장 큰 고민은 서독과 서베를린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실리 추구보다는 생이별한 가족과 친구들이 원활히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 서독은 이를 위해 1971년 동독과 통과여행협정(Transitabkommen)을 맺었다. 그간 서독 주민들은 동독 지역을 통과할 때 도로 사용료를 직접 지불했는데, 서독 정부가 이를 일괄적으로 지불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통과여행협정이 맺어지자 교통비 부담에서 벗어난 동서독 주민들은 활발하게 양국을 오가기 시작했다. 1969년 동독을 방문한 서독인의 수는 110만명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통과여행협정 이후 연간 방문 횟수 및 체류 기간 제한이 풀리며, 통일 직전 1988년에는 약 2600만명의 여객이 동서독을 오갔다.

 

/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서독을 오가는 인구가 늘어나자 인프라 확충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서독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동·서독 간 여객 운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고속도로, 철도, 내륙수로 개량과 신설에 나섰다. 서독은 1975년 헬름슈테드-베를린 고속도로 개량 공사에 25950DM을 지출했고, 서베를린 연결을 위한 철도 신설에 5100DM을 사용했다. 1978년에는 텔토우 운하 서쪽 접근로 공사에 7000DM, 1980년에는 포츠담 등 지역 노선 복선을 위해 900DM을 투자했다.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위기 때마다 동독을 구해준 서독의 스윙’ 제도

 

분단 시절 서독은 인프라 구축 및 교류를 통해 동독과 상생하는 모델을 만드는 한편 직접적인 경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동독에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제도를 통해 동독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을 때마다 금융 활로를 뚫어 파산 위기에서 구해줬다.

 

스윙(Swing)제도는 1950년대 양국 교역을 활발히 할 목적으로 도입됐다. 서독은 동독과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싶었지만, 동독의 채무가 늘어날수록 상품교역 역시 어려움에 처했다. 서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독에 일정 한도 금액을 무이자로 제공했다.

 

스윙 차관 최고 금액은 1960년부터 1968년 사이에는 2VE(실질 화폐가치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만든 화폐단위) 수준을 유지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7~8VE 수준으로 치솟았다.

 

슈타트 소장은 “‘스윙은 분단 시절 서독이 동독에게 제공했던 지원 중 가장 주요하고 규모가 컸던 금융지원이었다교류나 상생의 의미에서 벗어난 거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경제 지원이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빌리 브란트의 ‘의회해산’ 강수…리더십과 국민 지지가 관건 

 

분단 이후 통일까지 서독 주민들과 정치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동독 지원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격렬한 내부 반발이 있었다. 동독 지원에 반대하는 서독 정치인들은, 서독의 금융 지원이 동독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나아가 동독이 견고한 체제를 갖추게 되면, 영원히 독일 통합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독이 동독과 단 한 번도 교류를 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서독 내에서도 끊임없이 긴장이 있었다는 얘기다.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펼치며 동독과 1971년 기본조약(Grundlagenvertrag)을 맺는 과정에서 기민당(CDU독일기독교민주연합당)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사민당(SPD사회민주당)이 소련군 7중대냐는 비난도 있었다.” 이은정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연구소장의 설명이다.

 

빌리 브란트는 기민당의 반대를 이겨내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치고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초강수를 뒀다. 브란트는 1972년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에 총선을 펼치는 결정을 내렸는데, 브란트가 속한 사민당이 기록적 득표율을 올리며 제1당으로 올라서게 됐고, 브란트는 이같은 총선 대승을 바탕으로 자신의 동방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었다.

 

내부 반발은 동독에도 있었다. 당시 소련의 영향 아래 있었던 동독에는, 반대로 서독의 경제 지원이 자신들의 체제를 허물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총성 없는 전쟁을 펼치던 시기로, 소련은 서독의 동독 지원이 자신들의 세를 위협할 것으로 봤다.

 

그러나 냉전 시기에 막대한 군사비용을 지출하던 소련은 어떻게든 이 비용을 줄이고 싶었다. 이에 소련은 기본조약을 받아들이는 대신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유럽지역의 경계선을 보장받기로 합의했다.

 

슈타트 소장은 기본조약은 서독 내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어쨌든 빌리 브란트가 총선에서 이기며 동방정책에 대한 확실한 동력을 얻었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과 소련의 대치, 그리고 소련의 막대한 군사비용 지출도 기본조약 체결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만약 소련이 기본조약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기본조약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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