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시절 동‧서독 교역량 20배 증가… 서독 직접 투자가 현재 동독지역 산업 근간 마련

 

저 책상이랑 침대는 이사 들어올 때 단 100유로에 전 세입자한테 넘겨받았고, 매트리스만 원래 쓰던 걸 가져왔지. 여기서 내가 새로 사서 들어온 건 휴지밖에 없을 거야, 휴지는 중고로 안 팔거든.”

 

최근 이사를 한 기자의 독일 베를린 친구 집에서 새 가재도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앉으면 엉덩이가 푹 꺼지는 3인용 소파, 나이테 문양의 투박한 4단 조립식 책장, 바닥에 깔린 연두색 요가매트, 그리고 침대 옆에 시커먼 옷장은 모두 이전 세입자에게 반값에 사들인 물건이었다. 옷장 속에 걸린 옷들과 책장 선반을 꽉 채운 책들도 거의 중고매장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중고물품으로 방 안을 채우는 것은 흔한 일이다. 거리 곳곳에는 옷은 물론이고 자전거, 악기, 가구 등 다양한 중고가게가 쉽게 눈에 띈다. 중고품이 신상품에 비해 가격도 훨씬 저렴하단 장점에 독일인들의 실용성이 더해져 중고거래 네트워크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일상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교류는 어쩌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독일인들의 고유 특성일 수 있다. 동독과 서독은 1945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서슬퍼런 이념대립 시기에도 물품을 교역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이 철저히 단절됐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독일 베를린 시내 중심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문. 한 커플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결혼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상생교류두 마리 토끼 잡았던 서독

 

서독은 1949년 분단 직후부터 서로 필요한 물품 목록들을 일일이 작성해 교역했다. 당시 동독과 서독은 산업구조가 달랐던 탓에 물품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구조였다. 결국 생존에 대한 문제가 이념 대립에 앞섰던 셈이다. 물품 교역에는 상생과 실리추구, 그리고 하나의 민족이라는 공감대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독일이 동서로 분단됐을 때 경제 역시 두 개로 쪼개졌다. 동독과 서독은 서로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있었고, 분단 이후부터 통일까지 계속 존재했다. 서독은 1949년과 1951년 물품교류 확대 조약을 맺고 교류를 계속 늘려갔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을 당시에도 교류는 계속됐다. 이은정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연구소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독일 분단 이후는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동서독 간의 상품교역은 꾸준히 증가했다. 1950 74500 VE(실질 화폐가치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만든 화폐단위)에 불과했던 양국 교역량은 1960년에는 208200 VE까지 막힘없이 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교역량이 정체기에 접어들었지만,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를 기점으로 양국 교역량은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1970 44VE 수준을 보였던 양국의 교역은 통일 직전인 1989년에는 1539000VE에 이르렀다. 거의 20년 사이 4배 가까이 증가한 수준이다.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독일 분단 직후에는 동서독이 서로 엇비슷한 경제 규모를 형성했으나, 곧 서독은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급성장하며 동독과 경제 격차는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졌다. 서독의 경제 격차가 커지고 교역량이 늘어날수록 동독의 서독에 대한 경제 의존도 역시 점점 높아져만 갔다. 통일 직전 무역의존도를 보면 서독은 동독에 대한 의존도가 1.5%에 불과했던 반면, 동독의 대() 서독 무역의존도는 65% 이상에 달했다.

 

요헨 슈타트 베를린 자유대 독일분단연구소장은 동독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0년대 초 양국이 기본조약을 체결할 당시 서독의 경제규모는 동독의 3배에 달했다. 그때까지 400만명에 달하는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이탈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1970~1980년대 들어 서독 기업들은 동독과 상생하는 방식의 교역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 기업들은 부품 공장을 서독에 세워 동독의 값싼 노동력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렇게 생산된 상품들은 높은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서독 시장에서 활약했다. 슈타트 소장은 세탁기와 신발과 같은 상품들이 대표적이었다. 또 서독 기업뿐 아니라 스웨덴의 이케아 역시 대량의 상품을 동독에서 생산해 높은 마진을 남겼다고 말했다. 

 

동독지역에 산업 중심을 마련한 서독 기업의 직접 투자

 

독일 작센 주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사이에 위치한 켐니츠시()의 옛 이름은 칼 마르크스. 1848공산당 선언을 출판해 유럽과 아시아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칼 마르크스의 이름을 땄다. 도시 이름에 당시 동독 주민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이 그대로 반영됐다.

  

5월 22일(현지 시간) 켐니츠 시내에 조성된 칼 마르크스 기념비. 칼 마르크스 기념비 앞에서 모자축제 행사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그러나 522일(현지 시간) 켐니츠를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 마르크스는 더 이상은 공산주의의 표상이 아니었다. 머리에 검정 모자를 올려 쓴 마르크스는 켐니츠 모자 페스티벌의 주인공으로 변해있었다. 마르크스 기념비는 단지 과거 공산주의의 실패한 영광과 희화의 대상으로 서 있었다.

 

·서독이 통일되며 칼 마르크스시는 켐니츠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통일 이전부터 마르크스와의 이별은 예고돼 있었다. 독일 최대 규모의 폴크스바겐그룹은 1980년대 켐니츠에 직접 투자해 공장을 세우고 해치백 폴로를 비롯한 3종의 차량 생산을 시작했다. 현재 공장은 시내 중심에서 전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슈타트 소장은 서독 정부가 동독에 대한 직접 투자를 장려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에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금융지원 정책을 펼쳤다. 이에 서독 기업들이 동독에 직접 투자해 공장을 세우고 생산설비를 갖추면, 동독은 부품과 완성품의 운송을 책임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폴크스바겐그룹은 통일 이후에 동독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1990년엔 쯔비카우에, 2002년엔 드레스덴에 공장이 지어졌다. 동독 지역의 이 세 공장은 현재 폴크스바겐그룹의 주요 자동차 생산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도 켐니츠에선 1일 모터 3200, 쯔비카우에선 자동차 1350대가 생산되며, 특히 드레스덴 공장은 전기차 개발과 생산의 중심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2018년 기준 쯔비카우, 켐니츠, 드레스덴 공장은 각각 7700명, 1650명, 380명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 연방재무부 전 차관은 서독 지역 간 불평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며 “하지만 드레스덴, 라이프찌히 등 과거 동독의 주요 도시들은 현재 서독의 많은 도시들보다 훨씬 뛰어난 산업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독일 전체 경제를 이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작센주 켐니츠의 폴크스바겐공장.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