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독 분단 당시도 육·해·공 23개 노선 연결…상호교류 위한 교통망 확충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한반도 운명이 격랑에 휩싸여 있다. 지난 4월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형국이다. 오는 6월 12일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회담 결과에 따라 남과 북은 지금까지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바로 ‘남북상생시대’다. 

 

북미 정상이 비핵화와 체제 보장에 합의할 경우, 남과 북의 교류와 협력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특히 경제난 극복을 노리는 북과, 저성장 시대의 새 성장동력을 찾는 남이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이뤄낼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시사저널e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창간특별기획 ‘남북상생시대: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고민하다’를 취재·보도한다.  이번 특별기획은 한국보다 먼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독일 현지 취재를 통해 남북상생시대의 교훈을 모색해 보는 1부, 이른바 ‘한반도 신경제지도’로 대표되는 남북, 나아가 동북아 경제공동체의 미래 청사진을 조망해보는 2부로 구성했다.  [편집자 주]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독일 베를린 남서쪽, 숲이 울창한 드라이린덴. 이곳엔 8차선 고속도로 ‘A115’가 쭉 뻗어있다고속도로 위로는 승용차와 화물차들이 시속 80의 속도로 베를린시(市) 경계를 넘나든다. 고속도로 A115 내에는 독일 분단 시절 세워졌던 검문소 ‘체크포인트 브라보’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이 검문소는 언뜻 보기에 열차 한 칸을 떼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주둔한 연합군은 고속도로 위 바로 이 검문소에서 차량을 통제했다고 한다. 


기자가 드라이린덴 지역을 찾은 지난 5월 18일(현지 시간), ​검문소 건너편 육교 위를 달마시안 한 마리와 조깅하던 한 노인은 과거엔 모든 차량들이 일단 여기에 멈춰섰다. 검문하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은 차량들이 쌩쌩 달린다이 길은 과거 분단시절 경계 지역인 헬름슈테드·마리엔 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독일 분단 당시 동서독 접경지역 헬름슈테드마리엔 본에서부터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이 고속도로는 동서독을 연결했던 대표적 ‘길’ 중 하나다. 특히 동·서독 경계짓는 검문소를 관통하는 A1151921년 독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고속도로다독일 분단 시절에도 서독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베를린으로 달렸다.​ 결국 이 길 위에 분단부터 통일까지 교류·단절·소통의 독일 역사가 함축돼있는 셈이다

 

 

독일 베를린 외곽 드라이린덴 지역에 위치한 과거 연합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브라보.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이은정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연구소장은 “(독일 분단 시절에) 베를린이 없었으면 동독과 서독을 잇는 길도 없었다. 한국과는 조건이 다르다. 서베를린은 동독 한 가운데 있던 섬이다. 서베를린으로 오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닦았고, 철도협정을 했고, 우편교류를 했다. 모든 것이 베를린 때문이다. 이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 경제협력 얘기를 하기는 어렵다고 단언한다.

 

베를린은 동독 한 가운데 자리했던 탓에, 서독 입장에서는 연합군 점령지였던 서베를린 지역은 고립된 지역으로 남겨졌다. 한반도로 치면 북한 평양의 절반이 남한 땅이었던 셈이다. 서독 사람들은 서베를린에 남겨진 가족,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해 어떻게든 을 연결하려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길들은 유럽 전역으로 통하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발전해 양극단의 문화가 공존하는 베를린의 모순적인 냄새를 만들어냈다.

 

분단 이후 통일까지 서독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길은 제한적이었지만 사실상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르며 동독과 서독을 넘나드는 길의 문턱은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양쪽 지역 주민들 사이엔 언제나 소통과 교류를 위한 ‘길’이 존재했다. 통일 이전까지 동서독 간에는 도로 10개와 철도 8, 내륙운하 2개 그리고 항공로 3개 노선이 국경을 가로질렀으며, 서베를린 간에는 모두 8개의 통과로가 존재했다. 분단된 상태였지만, 동·서독을 느슨하게라도 연결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독일 분단 시절 동독과 서독(왼쪽)과 동독과 서독을 연결했던 철도와 도로 및 검문지역(오른쪽) / 그래픽=김태길, 조현경 디자이너

◇ 소통의 ‘길’을 뚫어라…동서독 간의 끊임없는 노력

 

서독 간 소통의 가장 큰 위기는 1961년이었다. 전쟁 직후 동서독은 비슷한 경제 수준을 누렸다. 그러나 서독 지역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동서독 주민들 간의 생활수준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졌다

 

요헨 슈타트 베를린 자유대 독일분단연구소장은 동독 지역 노동자들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TV와 라디오로 서독 주민들의 삶을 훔쳐봤다. 베를린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가장 용이한 지역이었고, 1961년까지 동독 주민 20% 가량이 서독으로 빠져나갔다. 특히 동독의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 유출은 동독 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을 향한 ‘이탈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화했다. 이에 동독과 소련은 1961년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장벽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장벽은 사람 두 명 높이에 약 160에 달했다. 장벽을 세우는 데는 총 400만 마르크의 비용이 들어갔다. 장벽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는 촘촘한 그물코처럼 사람들의 통행을 걸렀고, 장벽은 단숨에 동서독 교류를 차단하는 상징이 됐다. 동독과 소련은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서독과 맞댄 경계선을 치밀하게 관리했다. 길이 끊어지는 동시에 동서독은 소통의 위기에 처했다.

 

 

베를린 베르나우어거리의 베를린 장벽 추모공간. 당시 베를린을 동서로 갈랐던 장벽 일부분이 남아있다.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1961년 불쑥 솟아난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에 길을 잇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서독은 도로 철도 등 교통망 연결에 열을 쏟았다. 그중에서도 도로는 동서독을 잇는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됐다. 통일 이전 도로를 이용한 여객은 전체 여객 중 85%에 달했다. 철도가 14%로 뒤를 이었고, 해운과 항공의 비중은 미미했다. 화물 역시 60% 가량이 도로를 통해 운반됐다.

 

서독은 1972년 교통협정을 맺고 도로, 철도, 수로 등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섰다. 특히 동서독 양 측에 실리와 명분이 충분했던 고속도로 A115에 대한 대대적 투자가 이뤄졌다. 서독은 총 4500만 마르크의 비용을 지출하며 도로 노면을 보수하고 6차선으로 확장했다.

 

◇ 장벽 무너지자 전 세계로 연결된 분단 독일의 ‘길’​ 

 

이외에도 동서독은 1980년 베를린-함부르크 간 고속도로 사업에 착수했고, 베를린 남부 텔토브 운하를 재개통하는 등 장기적 인프라 구축과 동시에 소통 창구를 뚫어냈다. 다음은 이은정 소장의 설명이다.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엔 사람들이 고속도로 위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전철이 베를린 시내를 빙빙 돌았었다. 장벽이 세워지고 그게 불가능해졌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게 완전히 분단되는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인프라 투자에 대한 모든 접근은 분단 가족의 고통을 줄여야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통일은 나중이었다. 1971년 교통협정이 기본적으로 만들어질 때도 소통을 하자. 그 냉전에서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소통뿐이었다.” 

 

 

베를린 시내 중심의 과거 연합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현재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됐다. / 사진=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베를린 시내 중심에 위치한 지하철 코흐슈트라쎄역을 빠져 나오면, 과거 동서베를린을 구분하던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가 10m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프리드리히거리와 찜머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체크포인트 찰리는 현재 관광객들의 명소 중 하나다. 검문소는 멀리서도 한 눈에 띈다. 검문소 앞에는 약 3m 높이 기둥에 문짝만한 직사각형 사진이 앞뒤로 붙어있다. 동독 쪽에서 바라보면 미국 군인이, 서독 쪽에서는 동독 군인 사진이 박혀있다. 관광객들은 그 아래서 미군 복장을 한 사내들에게 2유로를 건네주며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과거 호주머니를 뒤지며 살벌하게 검문하던 장소는 이제 세계인이 찾는 관광명소로 변모했다. 베를린 북쪽 베르나우어거리의 베를린 장벽 추모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회색빛 장벽 대신 양방향이 훤히 보이도록 장대들이 꽂혀있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은 뚫린 공간에 서로 시선을 던지며 걷는다.

 

과거 단절됐던 공간이 하나 무너질 때마다 하나의 길이 태어났고, 그렇게 탄생한 길은 다른 길과 이어져 전 세계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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