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존부 아닌 ‘재판거래’가 핵심…헌법 위반이자 국민이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 빼앗아

판사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한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한 성향, 동향, 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파일은 있지만 리스트를 작성해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고 인정할 자료는 없다는 이야기다.


법원행정처의 재판개입 의혹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재판과 관련해 법원행정처가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을 청와대에 알렸고 판결 선고 후 동향을 분석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재판에 영향을 미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사실들이 형사처벌 대상으로 고발하거나 형사적 조치를 취할 사안도 아니라고 한다. 다만 행위자 별로 관여 정도를 정리해 인사권자인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전달하겠다고 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의 결론이다.

이 사건에 관여한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하지만 ‘판사_블랙리스트.hwp’라는 이름의 파일이 나오지 않았다고, 형사적 조치를 당하는 불명예를 피했다고 안심할 일인가?

애당초 이 사건은 블랙리스트라는 파일명을 가진 문서의 존재 여부, 이를 작성한 법관 등에 대한 형사법상 처벌 가능성이 중요하지 않았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라는 대한민국 헌법 103조가 사법행정권을 가진 정치 판사들에 의해 유린되었는가가 핵심이었다.

조사결과는 비참하다. 법원행정처는 권력자의 의중을 살피고 맞춤형 판결이 ‘상고법원 입법 추진’ 등 이권거래에 유리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어떠한 외압에도 독립돼야 할 판결을 협상의 도구로 인식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스스로 포기한 결과다.

특조위의 조사결과 발표 역시 국민적 우려를 완전히 해소했다고 볼 수 없다. 특정 법관의 성향 등을 파악했다는 것 자체가 법관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행위이고, 법관에 대한 독립성 침해는 판사 개인을 넘어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 위반이 분명하고 법관이 탄핵될 사안이다.

형사고발 의견을 내지 못하겠다는 특조단의 결론도 의문이다. 이 문건의 작성지시 자체는 직권남용이고, 조사를 방해한 행위들은 증거인멸로 볼 개연성이 상당하다. 사찰의 피해자인 차성안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행정부에서 이런 식의 조직적 사찰행위가 일어나 직권남용, 직무유기, 증거인멸 등 죄로 기소된다면 모두 무죄를 선고할 자신이 있는가?”라며 특조단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이번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다시 제시해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그들의 고고함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기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추신.
법원행정처는 특조위 조사결과를 25일(금요일) 오후 10시가 훌쩍 지난 시점에서야 기자들에게 알려왔다. 이날 오전 9시 30분부터 회의를 열고 최종 조사결과 도출을 논의한 것 치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자들 사이에선 법원행정처가 국민적 주목을 조금이나마 덜 받고자 ‘꼼수’를 쓴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유력 일간지들의 지면은 토요일에 나오지 않고, 주말이 되면 뉴스 주목도 역시 떨어지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방대한 보고서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하느라 시간이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기자들의 우려가 기우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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