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폭로 사전차단 및 재판 포기 등 해석 다양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 사진=뉴스1

 

이명박 전 대통령이 측근들의 참고인 진술서 등 검찰이 제시한 증거 모두를 동의했다.

혐의 전부를 부인하는 피고인 입장에서 이례적인 일로, 반대 신문권 자체를 포기한 이 전 대통령의 ‘셈법’에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전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정계선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차 공판기일에서 공소사실 입증을 위해 검찰이 제시한 증거 전부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다. 이 전 대통령은 증거 동의 배경에 대해 “국정을 함께 이끈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건 저 자신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참담한 일”이라면서 “변호인은 만류했지만 고심 끝에 증거를 다투지 말고 나의 억울함을 객관적인 자료와 법리로 풀어달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 역시 재판부에 “모든 증거를 동의하고 입증 취지를 부인한다”는 뜻의 인부서를 냈다. 증인들이 진술서와 같은 증언을 한 사실관계 등은 인정하지만 유죄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취지다.

이 전 대통령은 변호인단에 금도(襟度)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함께 일해왔던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 추궁하는 것은 국민께 보여드릴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전해졌다.

피의자가 혐의 전부를 부인하며 검찰의 증거에 모두 동의하는 사례는 다소 이례적이다. 검찰이 공소사실 입증을 위해 제시한 증거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내용이고, 통상 재판과정에서 변호인의 반대신문 등을 통해 양측의 첨예한 논박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복수의 법조인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이 예상되는 증인들의 법정 출석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40년 지기이자 ‘집사’로 불렸던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까지 이 전 대통령의 범죄사실을 검찰에 털어놓으며 돌아선 마당에, 법정에서 추가 폭로가 나올 가능성도 상당하다는 설명이다.

강신업 변호사는 “이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들은 재판 과정에서 추가 폭로를 하거나, 피고인의 유죄 신빙성을 강화하는 증언을 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 전 대통령이 반대신문을 통해 사실상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판과정에서 반대 신문권을 적극 행사했지만, 실익이 없었다”면서 “이 전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 사례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성폭행 사건에서 피의자가 검찰의 증거에 모두 동의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면서 “피해자가 법정에서 생생한 증언을 하면 재판부에 유죄의 심증을 심어줘 피고인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진술서 등 활자화된 내용으로만 다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체면과 역사적 평가를 고려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조인은 “‘국정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법정에서 다투는 모습은 국민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라는 이 전 대통령 주장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격과 체면을 살리고, 역사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취지로 읽힌다”고 말했다.

그는 “유죄가 불가피해 보이는 혐의들이 있는 상황에서 형량 조절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사면까지 내다보고 빠른 재판을 기대하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사실상 재판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한다. 나승철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이 전 대통령의 태도는 모순된다”면서 “형식적으로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며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백을 하는 셈이다”고 말했다. 

 

실제 이 전 대통령의 페이스북에는 “오늘 이명박 전 대통령 첫 공판이 열렸다. 이 전 대통령이 친필로 작성하고 법정에서 읽은 모두진술 전문”이라며 이 전 대통령이 노트에 자필로 쓴 11장 원고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두진술 친필 원고가 23일 오후 그의 페이스북에 공개됐다. / 사진=페이스북 갈무리


법리다툼을 벌이겠다는 이 전 대통령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다스와 관련된 횡령 배임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법리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면서 “‘객관적인 자료와 법리로 풀어달라’는 이 전 대통령의 말처럼 첨예한 법리다툼이 예상되고, 이 말을 굳이 확대해석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및 국고손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조세포탈,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 혐의 등을 받는다.

구체적인 범죄 사실은 ▲다스 비자금 348억 횡령죄 ▲ 다스 여직원이 개인적으로 횡령했다는 120억원을 특검으로부터 돌려받고도 영업외 수익으로 잡지 않고 분식회계 한 31억원의 조세포탈죄 ▲140억 BBK 투자금 회수와, 차명 재산관리인 김재정 사망후 상속세 문제 처리 문제에 공무원을 동원한 직권남용죄 ▲다스 소송비 대납 등 삼성그룹으로부터 받은 67억원 뇌물죄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7억원을 상납 받아 개인 용도로 쓴 뇌물죄 및 국고등손실죄 ▲공직임명 대가 등으로 받은 36억6000만원의 뇌물죄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22억6000만원, 김소남 전 의원 4억원, 최등규 대보건설 회장 5억원, 손병문 ABC상사 회장 2억, 이정섭 능인선원 주지 3억) ▲3402건의 대통령기록물을 영포빌딩에 은닉한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등이다.​

이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서울고등법원에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위반, 범인도피죄로 벌금 400만원 및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해 총 11회 형사처벌 받은 전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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