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올 때 나는 두 가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런던을 싫어했고, 진 리스의 소설을 사랑했다. 그 두 가지만은 확실했다.” 의 작가 제사 크리스핀은 자살을 고민하다 그렇게 런던으로 떠난다.

사진=우먼센스 김정선

<죽은 숙녀들의 사회>의 작가 제사 크리스핀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살던 집을 정리하고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사는 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사람들은 “기존 인생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한, 실을 끊어내고 방황한 영혼들”이다.

 

그래서 그는 진 리스를 ‘만나러’ 런던에 간다. 진 리스는 1890년 도미니카의 윈드워드 군도 중 하나인 로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엘렌 그웬돌른 리스 윌리엄스. 웨일즈 태생 의사인 아버지와 현지인과 영국계의 혼혈인 크리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특권층의 삶을 살았으나, 엄격하고 무심한 부모 밑에서 보낸 유년기가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16세가 되었을 때 런던으로 건너간다. 낯선 문화와 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배우가 되려고 예술공연학교로 전학했으나 슬프게도 재능은 없었다. 코러스 걸, 마네킹, 그림 모델 등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결혼도 했으나 파경에 이른다. 그 후 작가가 되어 <왼쪽 둑> <사중주> <맥켄지 씨를 떠나고 난 후> <어둠 속에서의 항해> <한밤이여, 안녕> 등의 작품을 썼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와중에 전쟁이 발발했고 작품들은 절판됐다.

 

다행스럽게도 하마터면 재능 없는 배우, 인기 없는 작가로 이름 없이 사라졌을 그는 이후 재발견되었다. 1958년 영국 BBC 방송에서 <한밤이여, 안녕>을 극화하면서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진 리스의 행방이 밝혀졌고, 그가 76세에 발표한 소설인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그에게 작가로서의 명예를 안겨주었다.

 

“나는 리스에 대해 더 조사해보기로 했다. 작가에 대해 너무 많이 알면 작품에 대한 애정이 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진 리스에 대해 실망하게 되더라도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느꼈던 감동이 반감될 수 있을까?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 주인공을 사랑한 남자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를 다시 조명한 이 소설에서는 도미니카의 문화적 유산과 크리올의 정서가 풍요롭게 드러난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몽롱하면서도 처참한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이 책을 낸 뒤 작가가 들었던 “가장 훌륭한, 살아 있는 영국 작가”라는 찬사는 빈말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헌신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누구에게는 단지 재산만을 노리고 결혼한 뒤 버리는 협잡꾼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흑인 문화,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관계, 여성의 관점과 남성의 관점이 뒤섞이며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가 쉽게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고 부르는 이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였는지, “크리올들은 유색인종의 피가 섞여 게으르고 퇴폐적이다”라는 편견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 소설은 또렷하게 들려준다.

 

“인간 진 리스에 대해 알게 되자 작가 진 리스의 작품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한때 약함으로 보였던 게 이젠 수동성으로 보인다. 한때 섬세함으로 보였던 것이 이젠 피해의식으로 보인다. 한때 사회와 성적 역할에 대한 명료한 견해로 보였던 것이 이젠 나쁜 행동에 대한 자기 합리화로 보인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도미니카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간 자신의 독특한 성장 배경에서 나온 것이듯, 진 리스의 소설은 대부분 자전적인 색채를 띤다. 그는 의지할 곳 없이 변방에 놓인 여자가 남자들에게 의존했다가 버림받는 이야기를 즐겨 썼다. 그 자신이 남자들의 호의에 의지하고, 버림받으면 울부짖고, 위로해주는 남자에게 의지하는 생활을 반복한 탓일 것이다. 결혼했지만 유혹당하는 여자, 남편에게 버림받고 낙태하는 여자,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여자.

 

제사 크리스핀은 진 리스에게서 “내 가방과 또 다른 가방과 내 온 인생을 들어주지 않을래요? 나는 못 들겠으니까” 류의 여성성을 발견하고,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못하겠노라 선언한다. 그가 사랑했던 진 리스는 이제 그에게 반면교사가 됐다. 작가의 삶과 작품은 얼마나 떼어놓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사실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일까? 어려운 문제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진 리스의 작품은 아름답다는 것.​

 

글쓴이 박사

문화 칼럼니스트. 현재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경북교통방송의 <스튜디오1035>에서 책을 소개하는 중이며, 매달 북 낭독회 ‘책 듣는 밤’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도시수집가> <나에게 여행을> <여행자의 로망 백서> <나의 빈칸 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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