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를 생리라고 말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사진=피의 연대기 align=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는 생리에 관한 영화다. 내가 자랄 때 이런 영화가 있었다면 지난 수십 년이 좀 더 편했을 거라 생각하니 억울하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생리를 했다. 생리통이 심할 땐 구토를 하거나, 기절을 하거나, 배를 잡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생리량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공공장소에서 옷과 자리를 적시고 수치스러운 꼴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탐폰은 꿈도 못 꾼다. 언젠가 한의사가 생리량이 많냐고 물었다. 

사진=(피의 연대기) 스틸 컷

 

“얼마나 많아야 많은 건데요?” 되물으니 젊은 남자 한의사가 고쳐 말했다. “요구르트 한 통 정도?” 나는 코웃음쳤다. “전체 기간에요? 2시간 아니고요?” 30대 중반에는 자궁근종과 내막종 수술을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생리량이 많으면 내막종이 재발할 수 있다고 6개월간 강제 폐경을 권했다. 그 후엔 미레나를 삽입하거나 매일 피임약을 복용하라고 했다. “언제까지요?” “그건 모르죠.” 중년 남성 의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자주 내 몸을 저주했고, 부끄러웠고, 불편했고, 위축되었다.

 

 

<피의 연대기>를 응원하는 것은, 뒤늦게 내 몸에 관심을 갖고 그 모든 게 불필요한 고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생이 달라지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경험에 대해, 더 큰 소리로 떠들고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내 주변엔 여자의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어떤 용품을 써야 하는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자상하게 얘기해주는 언니들이 없었다. 그들도 정보가 없었을 거다. 세상에는 수많은 여성 전용 미디어와 콘텐츠가 있지만 그들이 하는 얘기는 주로 ‘예쁜 몸’에 국한됐다.

 

최근에야 생리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고, 대안 생리대가 유행하고, 전문가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여자의 몸을 가장 잘 아는 여자들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대가 열렸다. <피의 연대기>는 그런 흐름에서 탄생한 역작이다. 인류의 절반이 겪는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검정 비닐 봉투에 꼭꼭 감춰졌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피의 연대기>는 충실한 취재로 우선 신뢰를 자아낸다. 이끼, 풀, 나뭇잎, 토끼 가죽을 쓰던 고대부터 신기한 대안 생리대까지, 생리용품의 역사를 담았다. 거기에 국내외 여성학자, 역사학자, 종교학자, 산부인과 전문의, 정신과 전문의, 문화평론가, 정치인, 유튜브 스타, 평생 천 생리대를 만들어 쓴 80대 할머니까지 인터뷰했다.

 

애니메이션과 모션 그래픽, 경쾌한 편집을 가미해 집중도를 높였다. 20~30대 여성 창작자들이 합심해서 만들었고, 스태프 비용을 쥐어짜서 제작비를 맞추는 한국 문화계의 악습을 따르지 않았다니 더욱 안심하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얘기를 조근조근 나누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스하고 평화로워진다. 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를 이해하려 노력할 용의가 있는 남자들도 즐겁게 볼 것이다.

 

김보람 감독은 극 중 직접 대안 생리대를 사용하고 후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역시 공감 가는 대목이다. 내가 끔찍한 생리의 고통에서 그나마 벗어난 것은 면 생리대를 쓰고부터였다. 거짓말처럼 생리통이 사라졌다. 정신이 아찔했다. 도대체 빌어먹을 기업들이 생리대에 뭘 갖다 발랐기에? 몇 년 후, 아니나 다를까 생리대 유해 물질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결과 처리는 지지부진했고, 논란이 된 생리대들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팔리고 있다. 그 사이 생리용품 탐험을 시작한 나는 빨기 힘들고 옷태 안 사는 면 생리대와 값비싼 수입 생리대 대신 생리컵에 정착했다. 일명 ‘짐승 용량’이라 불리는 생리컵을 해외 직구까지 해서 샀는데 여전히 성에는 안 찬다. 남들은 하루 종일도 쓴다는데, 내 경우는 양이 많은 날이면 2시간에 한 번씩 갈아줘야 한다. 그래도 이제 과거로는 못 돌아간다. 한번 생리컵을 쓰고 나니 축축한 생리대를 차는 것도, 생리대에 묻은 피 냄새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생리통이 생길까 불안해서 팬티라이너조차 못 쓴다. 

 

그래서 요즘 생리컵을 주변에 적극 권하는데,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안 그래도 궁금했어.” 아니면 “말도 꺼내지 마. 끔찍해.” 나도 10년 전 처음 생리컵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후자였다. 너무 번거롭고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언니는 여전히 “끔찍해” 쪽이다. 그녀는 아직 PMS(월경전 증후군)를 달고 산다. 나는 그녀에게 이 영화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몸을 공부하고, 얘기를 나누고,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우리의 몸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또 하나의 ‘피의 연대’를 위해서.​

 

글쓴이 이숙영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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