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이라고 부룰 수 없는 불명확한 태도…미래 기술 빌미로 드러난 문제까지 눈감는 것은 곤란

한국은 가상화폐를 규제하는 것인가, 아니면 양성화하려는 것인가. 정부는 가상화폐에 대한 원칙을 정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고려 때문에 대응을 미루고 있는 것인가.

이 같은 의문에 대해 정부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지금 가상화폐 정책 가운데 명확한 것은 아마도 모든 게 불명확하다는 것뿐일 듯하다.

최근 가상화폐에 대한 세계 각국의 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여전히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장에선 정부 정책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으로 나오고 있다.

◇가이드라인으로 변한 ‘특별대책’

정부가 지난 연말 ‘가상통화 투기근절을 위한 특별대책’을 내놓을 때만 해도 급등하던 가상화폐 가격은 큰 폭으로 조정을 받았다. 그 여파로 가상화폐의 위험이 일시적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렇다 할 후속대책이 나오지 않고 출렁이던 가격마저 안정 조짐을 보이자 투자자들 사이에선 이제 다시 매수를 해도 되지 않겠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규제와 양성화로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지난 연말 범정부 차원의 특별대책을 거론할 때만해도 시장에선 규제에 무게를 둔 해석이 강하게 나왔다. 그러나 이후 금융위원회가 1월말에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자 양성화로 돌아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 점차 힘을 얻어가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기조는 왜 갑자기 바뀐 것일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 내 주도권 경쟁에서 금융지식이나 기술에 대한 한계를 안고 있는 법무부가 뒷전으로 밀린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는 초기 가상화폐 대책을 법무부가 주도해 나갈 때만 해도 가상화폐는 비정상적 투기상품으로 청산돼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듯했는데, 금융당국이 전면에 나서면서 범죄나 자금세탁·탈세 등에 활용될 소지를 막는 선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양성화’란 해석에 무게가 실리는 것도 그래서다.

정책기조가 갑자기 바뀐 것을 두고 시장에선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가상화폐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 단속을 강화할 경우 자칫 자신들의 영역을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금융당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뒤 사태를 관망하는 게 아니냐는 게 첫 번째다. 또 하나는 규제를 할 필요는 있는데,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가상화폐 투자자들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에 정치적 고려로 규제를 늦춘 게 아니냐는 게 두 번째다.

어찌됐든 현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정부가 1월말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뒤 이렇다 할 후속조치를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가상화폐 정책은 ‘정책’이란 단어를 붙이기조차 어려울 만큼 불명확하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세계 각국 가상화폐 규제 강화 움직임

한국 정부가 이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유럽을 중심으로 가상화폐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EU의 경우 가상화폐 열풍에서 나오는 위험에 대해 국제사회가 명확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가상화폐를 규제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뜻까지 밝힌 상태다.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국제결제은행 총재는 “가상화폐는 버블과 폰지, 사기, 환경재앙을 합한 것과 같다"고 강력히 위험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세계 각국은 가상화폐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을 심각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가상화폐는 여러 가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가상화폐는 이동이 쉽고 추적이 어렵기 때문에 자금세탁에 사용될 소지가 농후하다. 은행을 통하지 않고 외환을 거래하는 송금체계가 마약거래나 테러자금 지원에 사용된 것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게다가 현재 시스템으론 가상화폐 거래를 통한 자금이동이나 세탁을 완전히 막는 것조차 쉽지 않다.

본질적으로 가상화폐는 제한된 수량만 발행된다는 이유로 투기 대상이 돼 가격이 폭등하는 허점도 안고 있다. 교환가치가 정해지지 않은데다 물량마저 적기 때문에 가상화폐 보유자들이 의도적으로 투자자를 끌어들이면 가격이 폭등하는데, 이것이 ‘폰지’ 사기의 전형이란 얘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상화폐가 화폐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상화폐는 이미 수백 종에 달할 만큼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고, 또 계속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현재 가격이나 가치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한계도 안고 있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은 가상화폐가 내포하고 있는 이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그 뿐 아니라 ‘화폐’ 또는 ‘통화’라는 단어로 시민들을 호도하고 있는데도 이를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스스로 이 단어를 사용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어정쩡한 당국의 태도는 시민들이 가상화폐 투기대열로 가도록 방조한 것이고, 정책의 불투명성이 가상화폐 버블을 초래한 셈이다. 그 여파로 지금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이 비생산적 영역에 쏠리고 있다.

정부는 이제라도 가상화폐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정부의 발표만 듣고도 가상화폐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가상화폐에 ‘화폐’란 단어를 허용한 것도 반성해야 한다. 한 때 저축은행에 ‘은행’이란 단어조차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금융당국이 그보다 더 큰 문제를 방기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블록체인 기술이 귀하다 해도 그 때문에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결코 정부가 마땅히 지녀야할 태도가 아니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