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조항 있지만 강요는 없어…세세한 가이드라인 부재

그래픽=셔터스톡

 

#최근 전자공학 관련 박사학위를 수여한 A씨(남·31)는 공공기관에 취업하기 위해 지원 서류를 내다가 곤욕을 치렀다. 블라인드 채용이 의무화되면서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학교 로고가 찍힌 워터마크를 모두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부가 모든 공공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거나 논문을 제출할 때 출신 학교, 출신지역, 가족관계 등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정보기술(IT) 직군이나 기술직·연구직 등에는 예외 조항이 많아 블라인드 채용의 의미가 무색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학교 워터마크를 지우는 것이 사실상 쉽지 않고 논문 내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 같다”며 “지도교수 이름은 지우지 않고 제출했기 때문에 교수 이름만 보면 학교는 충분히 추측가능하다. 블라인드가 무색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비단 A씨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관련 학과 학생들 대다수가 논문 워터마크를 지우면서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블라인드 채용이란 선입견 없이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서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다. 서류 전형에서 학벌, 외모, 출신지역, 가족관계 등의 항목을 서류에서 과감히 배제함으로써 실력과 자기소개서만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것이다.

한 대학 교수는 블라인드 채용에 대해 “공정하게 하면 의미 있지만 지원자가 공정하지 않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노출이 가능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교수는 “석사나 박사 뿐만 아니라 학생부 전형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공공기관 인사 채용팀 관계자는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서 내용이 지워지지 않는 선에서 본인이 알아서 학교 워터마크를 지워야한다”며 “수정테이프로 지우는 분도 있고 그림판이나 포토샵을 통해 워터마크를 지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도교수 이름도 지워야 하냐고 묻자 “지도 교수 이름을 지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지워야 하냐고 묻는 지원자들에게는 가려줄 것을 당부하지만, 모르고 그냥 제출하는 지원자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관련 정보를 지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연구직 등에는 예외적인 규정이 있고 유명한 교수 같은 경우 교수 이름으로 학교가 추측되곤 한다”고 답했다.

블라인드 채용에 관한 촘촘한 가이드라인은 부재했다.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공공기관에서는 정부의 감사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처음 시행하는 탓에 혼선이 있어 워터 마크나 지도교수 이름이 드러나는 경우도 잦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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