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작품이 전시된 국내 최초 자코메티 특별전…실존주의 철학 예술작품으로 표현

인간은 직립함으로써 독립한다. 유아기를 지나 홀로 일어서면서부터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서 인생을 시작한다. 지난 20세기 서구사회는 중세시대부터 이어져온 이성주의로부터 독립했다. , 이성, 합리주의, 조화 등에 의존해오던 사상의 버팀목을 걷어차고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직립했다. 지금 현재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존재와 사상의 자유를 획득했지만, 불안과 고독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증폭된 존재의 불안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현대인들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있다. 사람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이성이 쫓겨난 이후 부조리와 해체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걸음걸이처럼 불안하고 어설프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들은 불안과 고독 속에서 실존하는 현대인들의 초상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처절한 삶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얘기해준다. 목적이 상실된 시대의 불안함, 계절처럼 찾아오는 우울, 무심하게 주변을 찌르는 낯선 시선들 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제시한다.

 

지금 예술의전당에는 불안 속에서도 허리를 곧추 세운 조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자코메티의 철학이 담긴 작품 120여점이 전시 중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 최초 자코메티 특별전으로 조각, 회화, 판화, 드로잉, 사진 등 다양한 작품들이 포함됐다.

 

전시회 내부 / 사진=김성진 기자

특히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로타르 좌상의 원본 석고상이 아시아 최초로 공개됐다. 두 작품은 자코메티의 대표작으로, 자코메티 평생의 철학과 삶에 대한 통찰이 녹아들어있다. ‘걸어가는 사람20102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자코메티가 작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 모두 담겨있다. 작가 초기 시절부터, 아내, 동생, 지인들 등 주변인을 모델로 삼은 이유와 그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쉽게 풀어낸다. 자코메티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업했던 약 7평 공간의 작업실도 재구성돼있다.

 

우리는 모두 걸어가는 사람

 

전시 마지막 공간인 묵상의 방에는 자코메티의 대표작 걸어가는 사람이 전시돼있다. 새까맣게 어두운 공간 한 가운데서 목적도 모른 채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걸어가는 사람, 1960, 석고, 188.5 x 29.1 x 111.2㎝ / 사진=김성진 기자

이 사람의 온 몸은 가느다랗게 말라 앙상하고 비틀어졌다. , 다리, 몸통은 비정상적으로 두께가 얇은 반면, 손과 발은 그에 비해 거대하다. 온 몸은 무언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것 같기도 하고,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 형상 역시 불완전하다. , 코, 입 대강의 형태만 표현됐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대담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의 신체는 너무 곧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부릅뜬 두 눈엔 두려움이 서려있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고 정면을 쏘아본다. 그의 시선은 그의 신체와 함께 똑바로 걸어나간다. 바로 이것이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내딛어야 할 시선과 걸음이다.

 

1922년 파리에 정착한 자코메티의 작품에는 실존주의 철학이 짙게 물들어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 사르트르와는 사상적 동거를 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믿었다. 자코메티는 이를 공유했다.

 

그의 사상은 대표작 걸어가는 사람에 집약돼 있다. 인생이란 홀로서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홀로 걸어나가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불안과 고독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걸어 나간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걸어간다, 고로 살아간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예술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작업하는 이유는 이처럼 고통스럽고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보편적 주변인

 

자코메티는 그의 주변 지인들을 주요 모델로 삼았다. 특히 그의 동생 디에고, 연인 이사벨, 아내 아네트 등은 자코메티의 주요 모델이 되어 회화, 스케치, 조각 등으로 표현됐다. 자코메티는 이들 외에도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일본 출신의 철학자 야나이하라, 작가 조르지오 소아비, 사진작가 엘리 로타르 등은 자코메티의 유명 작품으로 남아있다.

 

자코메티는 그의 특정 주변인들로부터 보편성을 추출해냈다. 그가 작품으로 표현한 주변인들은 그가 작업을 하는 순간에는 위대한 철학자도, 사진사도, 예술가들도 아니었다. 평소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누군가였다. 주변인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바로 여기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에게 주변인들은 특정한 누군가인 동시에 낯선 이방인이었다.

 

인간의 얼굴은 그 어떤 얼굴도, 심지어 내가 수없이 보아 온 얼굴조차도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내 아내가 포즈를 취할 때도 사흘만 지나면 그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다.

 

 

앉아있는 남자의 흉상(로타르 III), 1965-1966, 청동, 65.7 x 28.5 x 36 ㎝. / 사진=김성진 기자

 

전시 말미의 한 공간에는 앉아있는 남자두 작품이 멀리 떨어져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하나는 석고 원형이고, 다른 하나는 원형으로 본을 뜬 청동 작품이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이 남자에게는 걸어가는 사람과는 또 다른 결의가 느껴진다. 흘러내릴 듯 하면서도 단단히 자신을 갈무리하고 있다. 눈빛도 미묘하게 다르다. ‘걸어가는 남자의 눈에 두려움이 서려있었다면, ‘앉아있는 남자에게는 어딘지 모를 슬픔과 후회가 담겨있는 것 같다.

 

자코메티의 대표작 앉아있는 남자는 사진작가 엘리 로타르(1905~1969)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로타르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방탕한 생활에 자기 자신을 모두 소모했다. 주변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파탄의 길을 걸었다. 자코메티는 모델 로타르에게서 인간 보편의 거대한 슬픔을 발견했다. 로타르의 실패한 삶에서 근원적 슬픔을 감지했다. 이 때문에 자코메티는 말년에 로타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만들어냈다.

 

 

전시회 내부. / 사진=김성진 기자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놓고 이렇게 평했다. “단순히 그림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다. 자코메티는 그림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평면적 모습에 환영을 입혀 우리로 하여금 마치 현실의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과 태도를 불러일으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전시된 120여개 작품 하나하나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 주변인들이 투영돼있다. 전시는 415일까지 이어진다. 관람시간은 2월까지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3월부터는 오전11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129, 226, 326일은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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