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에 천착했던 작가 김환기…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김환기, 색채의 미학' 전시 중

도시에서 자취를 감춘 푸른색이 종로구 부암동엔 아직 가득하다. 지난 시대의 촌스러움이 담긴 울퉁불퉁한 골목길과, 그 골목길 어귀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80년대 방앗관, 이발소, 그리고 찻집들은 옛 시절 들이마셨던 푸름을 하루하루 조용히 뱉어내고 있다. 인왕산 끝자락에 위치한 석파정, 건너편의 북악산과 한양도성길에는 자연의 푸르름이 계절과 함께 변주한다.

 

북악산 한양도성길을 따라 걷다 창의문으로 빠져 길 하나를 건너면 산자락에 위치한 환기 미술관을 마주친다. () 수화(樹話) 김환기의 작품들이 여기 모두 모여 있다. 환기 미술관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 부인 김향안 여사가 김환기의 작품 세계를 보존하고 소개하기 위해 건립했다.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를 맡아 1990년에 착공해 2년 뒤인 199211월에 준공됐다.

 

 

환기미술관 본관 1층 '김환기, 푸른빛에 물들다' 전시관 전경. / 사진=환기미술관 제공

지금 환기 미술관에는 푸른색들이 잔뜩 고여있다. ‘김환기, 색채의 미학이라는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환기는 1963년 뉴욕 체류시절을 기점으로 색점(色點)을 전면에 내세워 널따란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빨강, 파랑, 노랑 등의 강렬한 원색들을 단지 물감의 농담만으로 다양하게 표현하며 대상의 본질을 추출했다. 김환기는 색질감에 대해 끊임없이 몰두하고 연구했다.

 

김환기는 여러 색 중에서도 푸른색에 천착했다. 자신의 인생을 갈며 푸른색들을 빚어냈다. 푸른색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초기부터 관통하는 색으로, 한국의 산, 바다, 하늘의 본질을 푸른색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구체적 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푸른색은 그에게 철학, 자연, 우주를 표현하는 매개였다.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 본관은 총 3층에, 주제에 따라 4개의 전시관으로 나뉘어있다. 본관 1층 중앙홀에 들어가면 김환기, 푸른빛에 물들다라는 주제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한국의 산월을 모티브로 표현한 작품부터, 추상적 세계에 몰입했던 1960년대 작품, 그리고 1970년 이후의 전면점화 등이 전시돼있다.

 

그중에서도 전시관 중앙에 위치한 공기와 소리’(Air and Sound(i) 2-X-73 #321, 1973, 코튼에 유화, 264x208)는 김환기의 전면점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그림의 상단 3분의 2는 무수한 푸른 점들과 사각형이 작품 바깥에 있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나머지 부분은 푸른 점들이 고요히 좌우로 번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가느다란 하얀 빈 공간이 울려퍼짐과 잔잔함을 구분 짓는다. 마치 공기 중 퍼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기와 소리’(Air and Sound(i) 2-X-73 #321, 1973, 코튼에 유화, 264x208㎝). / 사진=환기미술관 제공

김환기는 자신만의 표현기법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색을 연구했다. ‘색질감 : 색과 질감의 다양한 변주에는 김환기 스스로 농담을 맞춰 제조한 물감, 종이와 천 위에 발색을 확인한 물감 블랜딩 샘플 등이 전시돼있다.

 

2층에는 빛깔로 조형되는 조형성이란 주제가 펼쳐진다. 다양한 색채들이 다양한 재료 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퍼져나간다. 같은 색이라 할지라도 신문지, 한지, 코튼, 종이 위에서 표현되는 질감은 다채로웠다. 김환기는 순수 추상의 세계를 담아내기 위해 색뿐만 아니라, 색이 칠해지는 재료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

 

김환기의 물감 색상대조표. / 사진=환기미술관 제공

3층에 위치한 색으로 빚어낸 공간의 울림에는 이번 전시의 정수가 담겨있다. 김환기가 추상회화 정점을 찍던 시절 1970년대 대형 점화들이 주로 걸려있다.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들이 점, , 면으로 모습을 달리하며 회전하고, 퍼지고, 스며든다.

 

김향안 여사는 김환기가 작품을 그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점, 작은점, 굵은점, 가는 점, 작가의 무드에 따라 마음의 점을 죽 찍는다. 붓에 담긴 물감이 다 해질 때까지 주욱 찍는다. 그렇게 주욱 찍은 작업으로 화폭을 메운다. 그다음 점과 다른 빛깔로 점들을 둘러싼다.”

 

환기미술관 3층 '색으로 빚어낸 공간의 울림' 전경. / 사진=환기미술관 제공

작품 우주’(Universe 05-IV-71 #200, 1971, 코튼에 유채, 254x254)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가 담겨있다. 정사각형 꼴의 작품은, 정확히 세로로 2등분 돼, 데칼코마니처럼 좌우의 구성이 거의 일치한다. 각각의 상단부에 위치한 구심점을 중심으로 푸른 점과 선과 면이 소용돌이친다. 점 하나하나에 당시 김환기의 마음이 담겨있고, 그 마음들은 또 사각형들에 둘러싸여 단절되는 동시에 연결돼 출렁인다.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요한 소용돌이에 마음을 빼앗긴다. 김환기는 자신의 우주를 표현하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을 수도사처럼 견뎌냈다.

 

생각나면 붓을 드는 그러한 공부 가지고는 우리가 꿈꾸는 예술가가 될 수가 없다. 하루라도 팔레트에 빛깔을 짓이겨보지 않고는 한 달이고 목욕을 못해 생리가 개운해질 수 없는 것처럼 돼버려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생활이 돼버려야 한다. 중략색질감, 그리고 색이 발산하는 공간의 지배-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Universe 05-IV-71 #200, 1971, 코튼에 유채, 254x254㎝). / 사진=환기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내년 4월 1일까지 이어진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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