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는 올해 가장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온다.

사진=영화 배드 지니어스 스틸컷

“미국 대입 시험 만점 따위는 제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사해보면 아실 거예요.” 주인공 ‘린’은 첫 장면부터 자신만만하다. 내가 누군데 그깟 시시한 시험 때문에 커닝을 했겠냐는 투다. 그렇게 잘난 아이가 어쩌다 조사관들 앞에서 진술을 하고 있는 걸까? 지난해 태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제목 그대로 못된 천재 이야기다. 그 아이를 못되게 만든 것은 교육 현장까지 침투한 물질만능주의와 입시 지옥이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실리에 충실한 소녀 린은 자신에게 매우 값비싼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걸 팔기로 결심한다.

 

영화 초반, 린은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고급 사립학교에 면접을 보러 간다. 앉은 자리에서 3년 치 학비, 밥값, 교통비를 10원 단위까지 암산해서 “수지가 안 맞으니 이 학교는 못 다니겠습니다” 하는 린을 보고 교장은 욕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장학금을 제안한다. 돈을 낼 사람은 많으니 너는 그 좋은 두뇌로 학교에 공헌하라는 의미다. 린이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도 비슷하다. 돈은 썩어나게 많은데 두뇌가 딸리는 아이들이 린에게 자본과 재능의 맞교환을 제안한다. 사회의 룰이 교육 현장에도 철저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피아노 운지법으로 객관식 정답을 알려주는 린의 기발한 전략은 그가 한꺼번에 여러 고객을 상대할 수 있게 해준다. 린의 비즈니스는 번창한다. 급기야 대담해진 아이들은 경계가 삼엄하기로 소문난 미국 대입 시험 부정을 모의한다. 고등학생이 커닝하는 영화라니 애들 장난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미국 대입 시험인 SAT 문제가 유출되어 강남 학원가에서 수천만원에 거래되거나 아시아권에서 시험이 취소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것은 큰 판돈이 걸린 진지한 범죄다. 영화는 케이퍼 무비(범죄인들이 모의해 무언가를 강탈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 영화)의 규칙을 충실히 따른다. 주인공들은 치밀한 작전을 짜고, 돌발 상황에 봉착하고, 기발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덜미를 잡혀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순간 마지막 ‘한탕’으로 반전을 노린다는 점도 일치한다. 최첨단 장비 대신 지우개와 신발, 린의 두뇌, 린의 위장, 린의 손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린은 작전의 설계자이자 선수로서 판을 장악한다.

 

그는 뛰어난 두뇌뿐 아니라 순발력과 배짱, 초인적인 집념까지 지녔다. 마지막 시험장에서 공범과 보조장치를 모두 잃고 혼자서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첩보 영화의 하이라이트 못지않게 긴박하다. 린을 연기한 배우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겉멋 부리거나 오버하지 않는 연기로 린의 천재성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영화 사상 가장 리얼하고도 매력적인 여성 안티히어로의 탄생이다.

 

여자가 중심이 되는 범죄 영화는 흔치 않다. 특히 여러 캐릭터가 뒤얽히는 케이퍼 무비의 경우, 리더 역할은 당연한 듯 남자가 맡는다. 케이크 위의 설탕 조각처럼 여배우가 한둘 끼긴 한다. 그들은 남자 주인공의 복수심에 불을 지르거나 조직원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활용된다. 때로는 섹시한 몸매로 스크린을 활보하며 극 중 타깃을 교란시키고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한국 영화 <도둑들>(2012)을 예로 들면 전자가 김혜수, 후자가 전지현이다. 외국 영화로 말하자면 <오션스 일레븐>(2001)의 줄리아 로버츠가 전자, <이탈리안 잡>(2003)의 샤를리즈 테론이 후자에 가깝다. 더 나쁜 경우는 남자 주인공이 해결할 문제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여성 캐릭터를 감정에 휘둘리는 ‘민폐녀’로 만드는 것이다. 게으른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케이퍼 무비의 전형적인 성 역할에 대해 영화인들은 무수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여자 관객은 남자 혹은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모두 보지만, 남자 관객은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논리다. 멀티캐스팅이 필수인 장르의 특성상 가장 존재감이 크고 티켓 파워가 높은 스타를 중심에 세울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게 남배우라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

 

<배드 지니어스>는 여성 캐릭터를 공정하게 활용해 범죄 영화를 만들고자 할 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단서를 제공한다. 린은 결코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의 실리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위기 상황에서도 긴장해서 호흡이 가빠지고 진땀을 흘릴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성이 아니라 두뇌를 무기로 쓴다. 물론 외모가 볼수록 매력적이고 몸매가 모델 같긴 하지만 그것은 이 캐릭터에 애정이 형성된 후에야 보이는 부수적인 장점일 뿐이다. 만일 돈을 주고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시켜야 한다면 나는 어떤 영화 속 캐릭터들보다 그를 선택하고 싶다. 일단 하기로 하면 그는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남자들처럼 요란스럽게 판을 키우는 대신 기지를 발휘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입시 부정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의 뒷이야기를 보고 싶다. 아니 꼭 그가 아니어도 좋다. 이렇게 쿨한 여자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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