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 김영동 의원 서훈요청 비해당결정처분 취소소송 ‘각하’…낙담한 가족 “실추된 명예 회복 노력”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유리창으로 태극기와 법원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제헌 국회의원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또 졌다. 후손들은 정부를 상대로 민사, 행정 소송들을 수차례 제기했으나 연달아 패소해 현재까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강석규 부장판사)는 김영동 의원(1907~?)의 아들 흥수(72)씨가 “아버지에게 훈장을 달라”며 행정자치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납북제헌의원들의 누락된 서훈요청 비해당 결정처분 취소’ 소송을 각하했다고 8일 밝혔다.

전북 고창 출신인 김 의원은 1948년 5월 남한에서 처음 치러진 총선에서 당선(전북 김제)돼 함께 뽑힌 197명과 함께 같은 해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하지만 김 의원을 포함한 40여명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현재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김 의원 등 수 명은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행정소송은 지난 7월 흥수씨의 서훈 요청을 행자부가 “김 의원이 공식 납북자로 인정됐으나, 현재 대한민국 내에 있지 않아 적절한 심사가 어려워 서훈을 수여할 수 없다”고 민원회신하며 물리치자 이뤄졌다.

법원도 흥수씨의 민원회신이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각하’ 판결했다. 각하란 소송이나 청구가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청구인의 주장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심판을 끝내는 결정이다.

재판부는 “행정청의 거부 행위가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이 되려면, 행정청의 행위를 요구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신청권이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신청권의 근거없이 한 국민의 신청을 행정청이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에는 그 거부가 신청인의 권리나 법적 이익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어서 항고소송의 대상이 아니다”고 전제했다.

이어 “대통령이 서훈대상자에게 훈장 등을 수여하는 것은 국가원수의 지위에서 행하는 고도의 정치성을 지닌 국가작용으로 대통령의 재량으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상훈법에 따르더라도 서훈 수여에 앞서 공적심사를 거친 후 서훈 추천을 받는데 그 주체, 방법, 절차 등을 규정한 근거 조항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따라서 원고(흥수씨)가 피고(행정자치부)에게 아버지에 대한 서훈수여를 신청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 신청권이 있다고 할 수 없다”며 “이 사건 민원회신은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이라고 볼 수 없어 법률에 따라 각하 한다”고 판시했다.

흥수씨는 2009년에도 국회사무총장을 상대로 ‘상훈제출거부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이듬해 “서훈수여를 신청할 신청권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 확정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김영동 의원(1907~?) / 사진=대한민국 헌정회

흥수씨는 이밖에도 수차례 정부로부터 외면 당했다.


정부는 1969년 제헌국회의원​들에게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할 때 김 의원 등을 제외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9년 12월 17일 제헌국회의원 154명에게 ‘제헌국회의원으로 우리나라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수립의 기틀을 튼튼히하는데 이바지했다’라는 공적요지에 따라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했으나, 김 의원을 포함한 34명의 제헌의원들에 대해서는 “월북인지, 납북인지가 뚜렷하지 않다”며 서훈에서 낙오시켰다.


그 후 30년 뒤 2010년 3월 국회에서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됐고, 2011년 12월~2014년 8월 진상규명위원회 등을 통해 김 의원을 포함한 29명이 공식납북자로 인정됐다.

흥수씨 등 납북된 제헌의원의 후손 13명은 2014년에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후손들은 정부가 자국민 보호 의무를 위반해 제헌의원들이 납북됐으며 이후에도 송환과 생사 확인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 배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4년 1월 이 사건을 심리한 서울고법 민사19부(재판장 윤성근 부장판사)는 제헌의원들의 업적을 기리면서도 전쟁 중에 제헌의원들의 납북을 막지 못한 것을 정부의 고의·과실에 의한 불법 행위라고 보기 어렵고 후손들이 연좌제로 고통 받았다는 증거도 부족하다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원고 패소 판결을 하면서도 재판부는 “제헌의원들은 대한민국과 국민이 현재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건국 초기에 초석을 놓았다.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라며 위로했다.

흥수씨는 후손 중 단독으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흥수씨는 시사저널e와의 통화에서 “아버님은 1927년 국내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1929년 4월 북간도, 연길, 용정, 연해주 방면에서 조선광복운동을 했다”면서 “1936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간 수형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군을 속이면서 군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창씨개명한 뒤, 금산양행이라는 사업장을 설립했다”며 “1941년 3월 봉천공업학원을 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1만원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또 “1941년 6월 발생기 제작소 등으로부터 나오는 이익금 전부를 성결교회와 동포들을 위해 희사한 사실이 201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도움으로 뒤늦게 밝혀졌다”면서 “아버님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노력이 작지 않다”고 말했다.

흥수씨는 정부를 향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정부는 그동안 단 한 차례의 생사 확인도 해준 바 없고, 독립유공자 신청도 국가보훈처에도 없는 수형인 명부를 가져오라는 이유 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서 “이제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흥수씨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내년 8월 김 의원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재심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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