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폭력은 권력관계 때문”…인권감수성 키워야

10일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변소인 기자
성폭력 관련 소식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리는 요즘,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을 찾아 원인과 해법을 물었다. 이 소장은 국내 첫 성폭력 상담소인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연구와 활동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를 만난 그를 10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6년간 운영돼 오고 있다. 그동안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면.
예전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잘 드러내지 못했다. 권리의식이 향상되면서 이제는 많은 분들이 성폭력을 넓게 인지하게 됐다. 그래서 한샘이나 현대카드 사건처럼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잘못된 비난을 염려해서 폭로하지 못했을텐데 이제는 인터넷에 폭로된 글을 보고 대다수 이용자들이 같이 공분하고 있다. 언론들 역시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

직장에서 성폭력이 두드러지는 이유가 뭔가.
직장에는 서열이 있다. 권력관계에 따라 부하직원들이 ‘네, 네’하면서 명령에 따르니 상사들이 환상에 빠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내려온 잘못된 문화를 나도 모르게 체득한 영향도 있다. 여성을 동료나 하나의 인간, 존중해야 하는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 회사 내 권력 관계 때문에 주변인들도 가해자 편에 서는 경우가 많다. 결국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한샘 사건을 어떻게 보나.
한샘 사건을 놓고 보면 피해자가 신입사원이었다. 지금 직장여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굴 생김새를 놓고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카카오톡 내용 등을 보고 꽃뱀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우리는 너무 순수한 피해자를 원한다. 피해자는 술도 먹지 않아야하고, 뭐든지 ‘싫어요’라고 표현하고, 한 사람과만 성관계를 갖고, 피해를 입으면 즉시 소리를 지르고 신고해야만 진정한 피해자라 여긴다. 아주 성편향적인 단서를 놓고 객관적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어떤 시선으로 봐야하나.
다른 것보다도 피해자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피해자다운 피해자는 없다. 8만 건의 사건을 접했으나 똑같은 피해자상은 없다. 8만 가지 피해자상이 있더라. 우리는 왜 잘못된 틀에 들어오지 않은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단죄를 짓는가.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성폭력을 당했다고 스스로 받아들이는데도 엄청난 혼란을 겪고 시간이 걸린다. 직장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때 이런 사실을 알리면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지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회사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거나 왕따 시키지는 않을지 단계별로 고민해야 한다.

인식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지름길은 없다.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해야 한다. 남이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싫다고 느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내 스스로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것을 관행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욕망이나 불만으로 사람들을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강의를 나가면 나이 많은 어른들께 이제 젊은 여성이 달라졌습니다. ‘내 딸 같아서’ 그런 거 절대 안 통한다고 강조한다.

회사에서 고쳐야 할 부분은 없나.
회사에서도 시스템을 잘 갖춰야 한다. 방하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상담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배치하고 직장 내 성희롱 처리 시스템을 잘 알아야 한다. 이분들은 피해자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고지를 해줘야 한다. 한샘 사건은 그런 것들이 부재한 허점이 다 드러난 사건이다. 회사에서 상담사가 자율적으로, 윗사람의 압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들이 사내 기구를 신뢰할 수 있다. 인적자원, 재정지원,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부분이다.

늘 무고죄 이야기가 나온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거대한 음모라고 생각한다. 추측이지만, 가해자 변호사들이 그렇게 코치를 하는 모양인 것 같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조건 걸고 보는 것 같다. 불합리하다. 무고죄를 주장하는 가해자들은 엄벌해야 한다. 진짜 무고는 걸러내야 하겠지만 피해자의 경험과 상황, 맥락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네이트판이 성폭력 고발 창구가 되는 이유는.
어디에다 말해도 피해자를 공감하거나 지지해주지 않아 불신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게 말 걸기를 한거다. 수많은 칼날이 있음을 알면서도 결연한 심정으로 글을 쓴 거다. 그 글을 게시하기까지 많은 갈등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일생을 걸고 쓰는 글이다. 글을 쓰고 나면 후회도 할 거다. 파장이 크니까. 이런 상황에서 네티즌들이 피해자를 생각한다면 신상정보를 파헤친다든가 비판적인 의견을 보내서는 안 된다. 응원을 백 번해줘도 모자랄 판국에 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피해자를 꽃뱀으로 모는가.

상담소 일정이 상당히 빡빡한 것 같다.
성폭력 관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매주 재판부에 의견서를 보내고 재판에 참여하기도 한다. 홈페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 ‘사이버 성폭력 토크콘서트’, ‘책읽기 소모임’, ‘성폭력생존자 자조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부설 여구소에서 연구활동을 꾸준히 해오면서 자료집도 발간하고 있다. 성폭력에 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상담소에 오면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
심리적, 의료적,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전화상담과 면접상담은 물론 성폭력 피해자의 힘기르기 측면에서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피해자들도 피해자로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응원과 지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소 인원이 부족하지는 않은가.
부족하다. 제대로 활동을 하려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현재 상담원 선생님은 열 분이다. 하루에 보통 8~10통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통화 중이라는 불만을 많이 받는다.

그동안 몇 건의 상담이 이뤄졌나.
8만 여건의 상담이 이뤄졌다. 처음 상담소를 열었을 때 전화가 안올 줄 알았다. 하지만 홍보가 나가자마자 상담 전화가 쏟아졌다. 26년동안 운영해 오면서 하루도 전화가 안 온적이 없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증거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이런 수치를 보면 숙연해지면서 동시에 책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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