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복판 갤러리 벽면을 가득 메운 그림 하나가 눈길 사로 잡아…그라피티 아티스트 심찬양이 전하고자 한 이야기

사진=나일론 이신재

 

사진=나일론 이신재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거리 위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켜 사람들은 ‘낙서’라 불렀다. 그라피티를 포함한 스트리트 아트는 하류 문화로 치부되었고, 일탈을 꿈꾸는 어느 젊은이의 반사회적 행위일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같은 부정적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통의 패션 하우스 구찌에서는 ‘구찌 고스트(Gucci Ghost)’라는 닉네임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트레버 앤드루(Trevor Andrew)와 협업을 시도했고, 패션계 새로운 형태의 컬래버레이션 열풍을 야기했다. 사뭇 달라진 시각은 국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성황리에 막을 내린 영화감독 겸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의 전시 <뱅크시 코리아 서울>, 도시 내 거리 곳곳에 자연스레 자리한 누군가의 흔적들과 이를 거리낌없이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까지. 이제 사람들은 벽면 위 ‘작품’을 마주하며 감탄을 내뱉고, 미소 짓거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약 1년 전, 한복을 입은 흑인 여성의 그라피티 벽화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아티스트 심찬양. 그 역시 이 모든 과정을 몸소 경험하고 목격한 산증인이다. 미국 현지 언론을 통해 유명세를 얻고 자신의 작업으로 하나 둘 높은 벽을 채워가기 전, 작가에게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2011년, 그는 어릴 적부터 그려온 그림을 그만둔 후 신학 공부를 위해 필리핀으로 홀연히 떠났다. “원래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아직 그 소망이 유효하다 보니, 마음속 바람을 반영해 흑인을 그리게 된 듯해요. 막상 필리핀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더라고요. 

사진=나일론 이신재

 

그래서 호주로 옮겨 1년 정도 그림을 그리다 한국으로 왔어요. 돌아오면서 언젠가 꼭 미국이나 독일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장 떠나지 않으면 내내 마음이 붕 떠 있을 거 같아 작업에 전혀 집중도 되지 않았어요. 여기에 당시만 해도 여전히 남아 있던 그라피티 아트에 대한 사회 인식이 여러모로 제가 서둘러 미국으로 가게 만든 것 같아요. 결국 작년 7월에 준비를 마치자마자 떠났는데, 그전까지는 지하철 와이파이 설치부터 인테리어까지 참 여러 일을 했어요. 정작 그라피티 아티스트로서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LA에서 지내는 3개월 동안 심찬양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여럿 일어났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우연히 문화 예술 공간 ‘더 컨테이너 야드(The Container Yard)’의 벽면 위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일이다. 아티스트 활동을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여성을 그려본 적이 없던 그. 그러나 왜인지 하루 만에 완성한 작품은 다름 아닌 한복을 입고 있는 검은 피부의 한 여성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라피티 문화는 힙합에서 비롯했으니 힙합과 관련된 것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글이나 한복 같은 주제는 전혀 떠올린 적도 없죠. 그런데 확실한 건, 미국에서는 그런 그림을 그릴 용기가 단번에 들었다는 거예요. 그곳 사람들은 한국적인 무언가를 굉장히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주변에 마침 흑인도 많았던 터라 주저 없이 ‘한복 입은 흑인 여자를 그려보려 한다’라고 갤러리 관계자에게 말을 꺼냈어요. 그리고 ‘그런 예쁜 주제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실행하기로 마음먹었죠.”

사진=나일론 이신재

 

심찬양의 작품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벽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림 속 소녀의 눈빛만큼이나 진한 여운과 감동을 전해주는 문장이 쓰여 있기 때문. 모두 당시 작가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을 떠올려 그림 위에 써 내려간 것이다.​

 

이처럼 그라피티 아티스트에서 그라피티 라이터로, 한층 성장할 수 있던 계기도 더 컨테이너 야드에서의 작업 덕분이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전, 갤러리 관계자가 다른 벽면을 보여주며 ‘나중에 다시 오면 여기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겠다’라고 약속했어요. 

 

그러다 정말 한 달 정도 뒤,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또 다른 흑인 여성의 작품을 완성했죠. 그곳에서 작업하면서 미국 뉴스에도 등장하고, 흥미롭다는 반응도 일기 시작한 거예요.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게 전부 더 컨테이너 야드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요. 사실 그 그림이 등 뒤에서 꽃이 피어나듯 저도 모르는 새 기회가 생기는 걸 상상해 그린 건데요. 어쩌다 보니 정말 실현됐네요.”

 

사진=나일론 이신재

그리고 다시,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라피티 아트를 향한 편견과 선입견은 상당 부분 자유로워졌지만, 심찬양에게는 여전히 왠지 모를 사명감이 존재한다. 최근 복합 문화 공간 ‘페이머스 그라운드’에서 연 전시 <찬사, Praise>를 선보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작년 4월에 개인전을 열었는데, 지금은 어떤 분이 제 그림을 보러 오실지 궁금했어요. LA에서 벽화를 그린 지 딱 1년이 지나서 스스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확인해보고도 싶었고요. 무엇보다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고 싶었어요. 

 

사진=나일론 이신재

이번 전시 주제가 ‘찬사’인 게, 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사소한 칭찬이나 좋은 이야기를 건네줬기 때문에 이제껏 이런 일을 해올 수 있었다 믿거든요. 물론 힙합 문화로서의 그라피티 정신이 없다면서 절 싫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그냥 전 문화를 오염시키지 않는,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인스타그램 소개글에도 ‘Not an artist but a HipHop fan’이라고 써뒀듯, 심찬양은 아티스트라기보다는 그저 힙합을 사랑하는 팬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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