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배급 분리 후 상황 낙관적으로만, 혁신기업 육성론도 빠져…구체적 청사진으로 설득해야

영화 남한산성의 긴장감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건 ‘칼’이 아니라 ‘말’이다. 전쟁을 다룬 이 영화는 말()이 아닌 말()의 블록버스터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화려한 군무처럼 펼치는 말의 전쟁은 그들이 그리는 세계관의 쟁투기도 하다.

 

영화가 아닌 영화업계를 둘러싼 말의 전쟁에 방아쇠가 당겨진 날은 1년 전 오늘이다. 20161031일 두 건의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지금은 각각 제2야당 대표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안철수, 도종환 의원이 대표발의자로 나섰다. 

 

두 법안의 핵심골자는 같다. 대기업의 상영과 배급 겸업을 규제하자는 거다. 쉽게 말해 CJ CGV와 CJ E&M, 롯데시네마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같은 그룹에 속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반대파들은 산업 경쟁력을 무기로 내세웠다. 주화와 척화가 세계관의 전면전이듯, 新영비법(편의상 두 법안을 합쳐 이렇게 부르자)을 둘러싼 말의 전쟁도 세계관의 일합(一合)이 됐다.

 

마치 명‧청 교체기처럼 정권이 바뀌었다. 도종환 의원이 장관에 취임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기업분할과 계열분리명령제 도입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뜻을 내보였다. 영화 ‘군함도’ 탓에 스크린독과점 논란이 또 불거졌다. 新영비법 찬성파들에게 유리한 대외환경이 조성됐다는 의미다.

상황은 그대로다. 성안에 문을 걸어잠근 채 같은 공방만 핑퐁처럼 주고받는 모양새다. 최근 열린 토론회에서도 ‘CJ, 롯데가 상영‧배급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국영화가 산다 vs CJ, 롯데가 철수하면 투자가 위축되거나 또 다른 대기업이 빈자리를 차지할 것이다’의 논쟁만 지루하게 반복됐다.

토론회 이후 기자는 꼬인 실타래가 한동안 풀리지 않으리라 직감했다. 양측의 간극이 너무 큰 탓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新영비법 찬성론이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기자는 공정한 영화시장을 만들기 위한 규제에 찬성한다. 한국 극장산업이 소수 대기업에 좌우되는 시장인 건 이미 여러 차례 기사로 다뤘다.(관련기사: [영진위 산업결산 맥 짚기]① “극장산업 독과점 극심”) 스크린독과점의 폐해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관련기사: [영진위 산업결산 맥 짚기]② “스크린 독과점 갈수록 악화”) 新영비법의 문제인식에는 공감했다는 말이다.


허나 新영비법 찬성파들의 주장에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CJ와 롯데 철수 후 나타날 결과에 대해서 막연한 낙관론만 횡행하기 때문이다. 최명길이건 김상헌이건 각자의 기대대로 벌어질 시나리오는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한쪽 편을 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했다는 뜻이다. 新영비법 찬성론에는 그게 없다.

한 배우는 “투자 위축은 계열분리를 싫어하는 이들이 내놓는 협박논리다. 도리어 다양한 투자처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계열분리를 싫어하는 이’가 아니다. 하지만 투자 위축이 반드시 협박논리라고 보지 않는다. 영화투자‧배급은 리스크(risk)가 큰 비즈니스다. 말로만 싸워서 제작비가 별로 필요치 않았을 듯한 ‘남한산성’에도 150억원 넘는 돈이 쓰였다.

지난해 기준으로 100억원 이상 돈이 쓰인 영화는 14편에 이른다. 돈을 많이 쓸수록 투자수익률도 높았다. 이 역시 근본적으로 따져 들어가면 소수 대기업에 집중된 시장 탓이다.(관련기사: [영진위 산업결산 맥 짚기]③ 대형영화 전성시대의 그늘) 하지만 최근 영화산업이 ‘돈 많이 쓴 영화’ 중심으로 흘러가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이상과 현실을 뒤섞기 시작하면 정교한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

그래서다. CJ, 롯데가 사라져도 비슷한 수준의 또 다른 대기업이 빈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논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CJ E&M과 롯데엔터테인먼트는 각각 16편, 7편의 한국영화를 배급했다. 2016년 기준 영화 한 편당 평균 총제작비는 24억원이었다. 단순계산해도 552억원이라는 돈이 나온다. 영화계서는 메인투자사들이 약 30% 안팎 제작비를 투자하는 게 관례다. 그렇다 해도 160억원 이상이다. 이 와중에 CJ E&M 영화부문은 지난해 239억원의 적자를 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투자에 지속적으로 나설 기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상영과 투자‧배급이 분리돼 스크린 독과점이 완화되리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영화진흥위원회 결산보고서가 잘 나타내듯, 독과점 원인이 겸업에 있는 지는 논란거리다. 극장 매각은 더 현실성 떨어지는 얘기다. 한해 매출 1조원짜리 기업을 살 수 있는 구매자는 극소수 대기업이나 외국자본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CJ CGV가 가령 삼성 CGV로 바뀌어도 당장은 수익확대 전략에 나설 것이 확실하다. 투자와 배급 겸업을 규제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그나마 현실성 있는 대안이지만 그로 인해 무엇이 더 나아질지는 의문이다.

또 하나 아쉬운 건 新영비법 찬성론에 혁신기업 육성론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반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9개 제작사가 주주로 나서 ‘공공 배급사’를 표방해 설립한 리틀빅픽쳐스가 있기 때문이다. 리틀빅픽쳐스는 ‘카트’,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등 수준 높은 작품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래도 설립 후 4년이 지난 오늘까지 상업적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물론 개봉 시 주요 상영관 확보가 어려워 흥행에 실패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NEW와 최근 키위미디어 등 非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가 상업적 성공을 발판 삼아 시장에 안착한 사례도 있다.

기자는 영화애호가를 자처한다. 독립영화 시장에도 관심이 많다. 하지만 산업을 취재하는 기자기도 하다. 공정한 시장생태계를 지향하지만 안이한 낙관론은 경계한다. 불공정과 편법을 감시하되 공정하게 경쟁했을 때 대기업을 앞설 혁신기업이 존재해야 시장이 나아진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新영비법을 내놓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정계 입문 전부터 ‘한국경제 동물원’론을 주창해왔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동물원 구조 탓에 한국경제가 발전하지 않고 있다”는 논리 말이다. 안 대표는 국내 영화산업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안 대표가 세운 안랩(AhnLab)은 독자적 기술력과 혁신 덕에 장기생존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다. 안티테제(Antithese)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정교한 청사진을 내놓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게 규제 법안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공정한 영화시장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기자도 그 청사진을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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