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려준 밥상을 맛있게 먹었을 뿐입니다.” 어느 배우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 직접 밥상을 차리는 배우들이 있다.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align=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되는 건 아니다.’ 스포츠계의 불문율이다. 영화계도 마찬가지지만 더러 예외는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배우들이 제작사를 차려서 직접 프로듀서가 되거나 연출을 하는 경우가 많다. 돈을 떠나 자기가 출연할 작품을 직접 발굴하려는 의도가 크다. 그게 전통으로 자리 잡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조지 클루니, 벤 애플렉처럼 연기와 연출 모두에서 정상에 오르는 이도 생겼다.

 

아쉽게도 여자는 사정이 다르다. 요즘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자로서 대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감독으로 성공한 여배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꾸준히 연출을 하는 게 안젤리나 졸리다. 오랫동안 유엔 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약한 졸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에서 연출의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미국 육상 선수, 캄보디아 대학살 피해자 등 전쟁과 인권 문제에 주목한다. 예외는 전남편 브래드 피트와 동반 출연한 <바이 더 씨>(2015)였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권태기에 빠진 예술가 부부를 그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젤리나 졸리가 명품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관광 홍보 영상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그가 항상 인간의 내면을 너무 얄팍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 출신 여성 감독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엘리자베스 뱅크스다. 뱅크스는 톱스타가 아니다. ‘<헝거게임>(2012~2015)에서 캣니스(제니퍼 로렌스 분)의 담당 스타일리스트로 나온 예쁘고 웃긴 여자’라고 하면 아시려나? 하지만 그는 남편과 회사를 차리고 코미디 영화 <피치 퍼펙트>(2012)를 제작해 돈방석에 앉은 할리우드 파워 우먼이다. <피치 퍼펙트>는 1천7백만 달러짜리 저예산 영화인데, 전 세계 수익은 1억 1천3백만 달러에 달했다. 당연히 속편 제작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작의 감독은 다른 영화를 찍겠다고 떠난 상태였다.

 

그때 뱅크스가 연출한 단편영화를 본 유니버설 픽쳐스 회장이 직접 연출을 해보라고 권했다. 결국 <피치 퍼펙트2>는 전작을 능가하는 2억 8천7백만 달러를 벌었다. 내친김에 뱅크스는 <미녀 삼총사>(2019) 리부트 프로젝트의 감독까지 맡았다. 여성 감독이 주류 상업 영화, 그것도 화제성이 보장된 프랜차이즈 액션 영화를 연출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뱅크스가 할리우드 여배우팀의 주전 선수는 아니었지만 여성 감독 중에서는 가장 앞선 셈이다.

 

한국에도 연출에 도전한 배우들이 있다. 우선 하정우, 박중훈, 유지태, 조재현이 그랬다. 하지만 아직은 감독보다 배우로 이들을 기억하는 관객이 더 많다. 그나마 전업에 성공한 건 여자들이다.

 

방은진은 1990년대 <301 302>(1995), <학생부군신위> (1996), <산부인과>(1997) 등에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았다. 2000년대 들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싶더니, 엄정화 주연의 범죄 스릴러 <오로라 공주>(2005)를 들고 돌아왔다. 배우 출신 감독이 흔히 자신을 주연으로 세우는 데 반해, 방은진은 두 커리어를 철저히 분리한다. <오로라 공주>뿐 아니라 <용의자X>(2012), <집으로 가는 길>(2013)에서도 그는 카메라 뒤를 지켰다. 아쉽게도 작품만 봐서는 ‘방은진 감독의 스타일은 이거다’라고 말할 게 없다. 다만 주류 영화계 내에서 여배우가 설 자리를 계속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배우 겸 감독 구혜선의 문제는 정확히 반대다. 그는 <요술>(2010), <복숭아나무>(2012), <다우더>(2014) 등 장편영화만 벌써 세 편을 연출했다. 그는 늘 자의식 과잉이라거나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착실하게 작가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

 

가장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이는 문소리다. 지난 9월 개봉한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대학원 과제로 연출한 단편영화 3편을 묶은 것이다. 이 영화, 거두절미하고 재밌다. 감독의 개성도 뚜렷하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에 특별 출연한 문소리는 “몸이 풀릴 만하니 촬영이 끝나버려서 너무 아쉬웠다”라고 토로한 바 있다. 영화는 바로 그 마음, 열정은 끓어 넘치는데 쏟아낼 데 없어 부글거리는 여배우의 속내를 재치 있게 그렸다. 다른 한편에는 아이 키우고, 시어머니 병 수발하고, 육아 문제로 친정어머니에게 민폐 끼치면서 미안해하는 평범한 여자가 있다. 여성에게 우호적이면서 매 장면 통찰과 위트, 혹은 감동을 담아내는 신인 감독이라니, 한국 여배우들에게 이보다 고마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리하여 <여배우는 오늘도> 홍보에 전도연, 공효진, 라미란 등 톱스타가 줄줄이 출동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분야에서 여자로 일하다 보면, 그리고 당신과 같은 레벨에 있는 남자들이 얻는 돈과 기회를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연기가 좋다. 연출을 시작한 건 배우로서 좌절했기 때문이다. 연출을 한다고 잃을 게 하나도 없었거든.” 문소리도 라디오에 나와 “밥상을 차려주면 잘 먹겠는데 다들 안 차려주니까 농사부터 지은 것”이라고 했다. 영화계 남녀 차별로 얻은 수확이 딱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게다. 배우로 만족하고 잘 살 뻔한 여자들이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게 해준 것.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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