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를 입고 위스키를 마시며, 랜덤 섹스를 즐기고 쌍권총을 휘두르는 여성 액션 히어로라니,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샤를리즈 테론 덕분에 여자들에게도 욕망이 허락되었다.

“샤를리즈 테론이 차기 제임스 본드가 되어야 한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토르’ 역으로 유명한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가 최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전 세계 가십 미디어와 비평가들은 즉각 논쟁에 뛰어들었다. “끝내주는 아이디어”라는 환호, “정 하고 싶으면 새 시리즈를 만들면 되지, 왜 007을 건드리나”라는 반론이 엇갈렸다. 제임스 본드로 말할 것 같으면 남자들의 욕망을 집대성한 캐릭터, 남자들의 롤 모델, 남근의 수호신 같은 존재다. 바로 그런 상징성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낮더라도 이번 논의는 큰 의미를 지닌다.

 

디즈니 특유의 공주 캐릭터를 씩씩하게 전복시킨 <겨울왕국>(2013)이나 <고스트버스터즈>(2016)의 여성 버전 리메이

사진=우먼센스

크, 여성 주인공 단독 블록버스터 <원더우먼>(2017) 등이 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는 강하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계발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영화만 그런 건 아니다. 최근 영미권 남자 소설가들이 여성스러운 필명을 짓고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장르물을 쓰는 흐름이 출판가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크리스 헴스워스의 발언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전지현 주연의 <암살>(2015)이 1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 대작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지만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 영화인들이 여전히 남자 형사, 남자 검사, 남자 조폭, 남자 영웅들과 질척한 사랑에 빠져 있는 사이, 할리우드는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금맥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그 흐름을 대변하는 배우다.

 

1975년 남아공에서 태어난 샤를리즈 테론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LA로 건너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안 잡>(2003)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른 그는 같은 해, 너무 출중한 나머지 오히려 족쇄가 되던 미모를 철저히 숨기고 레즈비언 연쇄 살인범을 연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몬스터>). 하지만 그 후 오랜 정체기가 이어졌다. 

 

샤를리즈 테론의 대표작은 영화가 아니라 디올 자도르 향수 광고였고, 어쩔 수 없이 그도 할리우드의 마녀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2012). 할리우드는 미모와 연기로 이름을 날리던 여배우가 30대 후반을 넘어서면 마치 조롱하듯 어린 여자를 괴롭히는 마녀 역할을 던져주곤 한다.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만, 안젤리나 졸리, 줄리아 로버츠도 별 수 없었다. 하지만 테론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21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한 편인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2015)에 캐스팅된 것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새로운 <매드맥스>에서 터프한 차림새로 대형 엔진을 몰며 악당과 싸우는 영웅 역할을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맡겼다. 그 결과, 샤를리즈 테론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타이틀 롤인 톰 하디로부터 영화를 탈취하다시피 했다. 

 

<에이리언>(1979~1997)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가 섹시하다기보다 경외감이 드는 쪽이었고, <툼레이더>(2001~2003) 시리즈의 안젤리나 졸리가 사랑만큼 질투를 함께 받은 배우였다면, 샤를리즈 테론은 여자든 남자든 LGBT든, 누구라도 섹시함과 존경심을 함께 느낄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배우 리암 니슨은 <테이큰>(2008) 덕분에 나이 56세에 갑자기 맨몸 액션의 아이콘이 되어 전성기를 맞았다. 최근 행보를 보면 샤를리즈 테론이 그 뒤를 이을 기세다. 할리우드에서는 배우들이 자기 배역을 확보하기 위해 직접 제작자로 나서는 경우가 흔하다. 샤를리즈 테론도 종종 그랬다. 

 

최근 그가 선택한 영화는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첩보 액션물 <아토믹 블론드>다. 미국 시사회 이후 비평가들은 “샤를리즈 테론이 멋진 슈트를 입고 나와서 동성과 섹스를 하고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게 전부”라는 평을 내놓았지만 테론의 팬들은 “그거야 말로 우리가 바라던 바”라고 환호했다. 감독은 발레리나 출신인 샤를리즈 테론이 특유의 유연성과 긴 팔다리를 이용해 액션을 멋지게 소화하는 것을 보고 격투신에 점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제임스 본드처럼 세련되고, 제이슨 본(<본 아이덴티티>, 2002)처럼 완벽한 실전 무술을 구사하며, 제임스 딘처럼 고독한, 유례없는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배역이 먼저인가, 배우가 먼저인가’라는 물음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물음과 같다. 좋은 작품과 배역 덕분에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고 스타가 있기에 그에 맞는 작품군이 개발되기도 한다. 왜 대작의 주인공은 항상 남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할리우드의 흔한 대답은 “여자 영화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에겐 샤를리즈 테론이 있다. 그의 발차기라면 분명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다.​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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