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기업 키워낼 등용문으로서 활력 잃어…중소·벤처 성장에너지 분출시킬 투자생태계 복원을

필자가 지난 1999년 금융감독원이 설립된 직후 현물시장과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IMF 사태 직후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유망 중소·벤처기업들을 발굴·육성하기 위해 코스닥시장 활성화를 추진했다. 때마침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나스닥(NASDAQ), 일본의 자스닥(JASDAQ), 유럽연합(EU)의 이스닥(EASDAQ), 독일의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 등 벤처시장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던 터라 우리나라도 그런 앞선 시장들을 벤치마킹하여 IMF 사태 이후 붕괴된 경제를 단기간에 회복시킬 붐을 조성하려 했다.

그 당시 코스닥시장은 증권업협회에 속한 장외시장이었다. 하루 총거래금액이 50억원 수준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정부와 금감원의 노력으로 강력한 코스닥시장 활성화 방안이 발표되고 코스닥기업들에게 세제혜택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지자 갑자기 불붙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6조원이 넘는 초대형시장으로 변모했다. 전산용량이 모자라 주문 후 7~8시간 지나서야 매매체결이 이루어졌고 투자자들의 민원이 빗발쳤다. 오늘날 코스닥시장이 증권거래소의 어엿한 장내시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지난 9월 2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자본시장의 역할'이란 주제로 자본시장연구원 20주년 기념 콘퍼런스가 열렸다. 안동현 원장은 기조연설에서 "앞으로 한국 경제의 재도약 여부는 자본시장의 역할에 달려 있다"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혁신자금의 공급,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생산적 금융, 인구고령화에 대비한 은퇴자금 마련, 취약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이 오늘날 우리 자본시장에 맡겨진 중요한 임무"라고 했다.

이어 축사에 나선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금까지 우리의 자본시장은 혁신기업을 발굴하고 생산적 자금을 공급하는 시장 본연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면서 "앞으로 시장질서 및 금융수요자의 이익을 해하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진입 문턱을 낮추고 금융투자업자들의 자율성을 높여 자본시장의 역동성과 효율성을 회복하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주제발표에 나선 한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주식시장이 그동안 성장성 높은 중소기업 보다는 성장성 낮은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상장비중이 컸기 때문에 자본시장의 발달이 저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주식시장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연구개발(R&D) 투자, 특허 출원, 과학기술 관련 학술문헌 출판 등 혁신활동이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기에 기술혁신이 생산성 증대와 제품 및 시장의 창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주식시장을 통한 직접금융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의 주식시장은 필자가 금감원의 현물시장과장으로 근무할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주식시장은 될성 싶은 떡잎들을 발굴하여 우량기업으로 키워내는 산업 등용문으로서의 활력을 잃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생산적 금융을 강조함에 있어서도 정책의 무게중심은 자본시장 육성보다는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에 실려 있는 느낌이다.

특히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이에 부응할 많은 벤처기업들에게 풍부한 모험자본을 연결시켜 자립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IPO(기업공개) 시장이 크게 위축되고 중소·벤처기업보다는 중견·대기업 위주의 상장이 이어지다 보니 엔젤투자, 벤처캐피탈 투자, 코스닥 상장으로 이어지는 모험자본의 선순환적 투자생태계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고, 이로 인해 신흥기업들의 젓줄인 자본시장의 성장이 가로 막히고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보유한 창의적 혁신기술들을 비즈니스로 연결시켜 성장에너지로 분출하도록 투자생태계를 복원시켜야 한다. 특히 극심한 고용난 속에 해마다 스펙 좋은 인력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이들을 만족시킬 일자리를 보다 많이 공급하려면 시중에 넘치는 여유자금을 생산적 모험자본으로 끌어들여 창업기업들이 속속 탄생되는 데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중소·벤처기업 성장을 이끄는 한국벤처투자의 모태펀드에 역대 최대규모인 총 8300억원의 추가경정예산을 배정하여 모험자본의 마중물 역할을 하도록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시장 문턱을 낮추고 금융투자업자의 자율성을 높여 자본시장의 역동성과 효율성을 회복시키겠다는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의 말에 기대를 걸어본다. 김 부위원장은 필자가 금감원의 현물시장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기획재정부 증권제도과에 근무하면서 필자와 호흡을 맞추었다. 그러기에 그의 시장 보는 식견과 탁월한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안다. 분명 그는 우리 경제의 불쏘시게 역할을 자임하며 자본시장의 활력 제고를 위해 무엇인가 해낼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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