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과 회사 ‘意義’ 곱씹어야

요란하다. ‘부담’ ‘적자’ ‘파산’ 등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1심 판결에 대한 재계 반응은 아쉬움을 넘어 국민과 법원에 대한 협박으로까지 들린다.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앞세웠지만, 신의(信義)는 한쪽에만 적용되는 일방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모를까.

법원은 지난달 31일 기아차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이른바 통상임금 소송에서 노조 측 손을 들어줬다.

정기상여금 등의 통상임금 인정 여부, 신의칙 적용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강행규정(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규정)인 근로기준법에 의한 노동자의 권리행사를 막연한 예측으로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게 판결 핵심이었다.

기자는 법원 판결에 앞서 사측의 항변을 보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사측은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설령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노조 측 청구는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펼친 것인데 법리 다툼에 치중한 나머지 신의는 없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신의는 믿음과 의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써 ‘관계’에 대한 언어다. 이런 전제에서 ‘사측은 노동자와 관계에서 얼마나 신의를 지켰나’라는 의심이 든다.

사측은 먼저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했어야 했다. 사측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근로자들에게 3200억~7800억원의 경영성과급을 지급했는데, 이는 대법원 판례가 요구하는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모두 갖춘 것이었다. 판결 전 법조계 안팎에서도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으로 인정된다는 데 이견이 많지 않았다. 현대차 통상임금 소송처럼 ‘고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측이 승소한 사례를 떠올렸다면 얄팍한 기대에 불과했다.

신의칙 적용 역시 마찬가지다. 신의칙은 강제적이고 최우선으로 적용되는 법률이 아니라 일종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마땅한 임금이지만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지급하기 어려운 사정을 참작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여론전을 보노라면 노동자에 대한 미안함 따윈 찾아보기 어렵다. 신의칙이 마치 최우선 가치가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모양새다. 우리 법원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을 고려하고 있으나, 제한적이고 최후 수단으로써 사용해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다.

이는 통상임금 판례로 종종 인용되는 2013년 (주)갑을오토텍 소송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수 의견을 낸 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은 “신의칙을 적용해 실정법상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최후수단으로 법의 정신이나 입법자의 결단과 모순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고려해 볼 수 있는 방안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신의칙을 내세워 사용자의 그릇된 신뢰를 권리자인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 찾기에 우선할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신의칙에 대한 1심 판단은 절대 ‘심리가 미진하다’고 평가절하될 사안이 아니다. 재판부가 밝힌 신의칙 배척 이유는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법원에 따르면 기아차는 매는 1조~16조원의 이익 잉여금을 보유했고,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단 한 번도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 사측은 또 중국의 사드(THAAD) 보복과 미국의 통상압력에 따른 영업이익 감소를 주장했으나 명확한 증거자료를 제출하지도 않았다.

이에 반해 “법원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라는 사측의 공식 입장은 논리 없는 협박에 불과했다. 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한 법리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가 없고, 다만 부담액이 수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막연한 우려만 강조했다. 당장 적자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법원은 “노사 간 합의로 분할상환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답까지 내주지 않았던가?

사측은 ‘회사의 의의(意義)’를 다시 한번 살펴보길 바란다. 상법상 회사는 ‘상행위 기타 영리를 목적으로 설립된 사단법인’을 의미하고, 여기에서 ‘영리’는 회사가 이익귀속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익이 사원에게 분배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노동자들의 연장·야간·휴일근로 등 과외 근로로 생산된 이득을 기업이 향유했다’라는 재판부의 지적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신의는 일방적인 용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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