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노동계 희비, 항소·상고 예측불허…엇갈리는 ‘신의칙’ 적용 잣대 바로 세워야

법원이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1심 재판에서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해 기아차 사측은 즉각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아차는 물론, 재계 전체가 강력히 반발하는 모양새다. 노동계는 환영 의사를 나타냈지만 통상임금 인정 범위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재판부가 내린 1심 선고의 핵심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청구로 발생한 기아차의 재정적 부담이 신의칙에 위배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이에 대해 기아차는 “회사 경영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으로 신의성실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전체 청구금액 1조926억원(원금 6588억원, 이자 4338억원) 중 법원이 인용한 4233억원(원금 3126억원, 지연이자 1097억원)만 해도 감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기아차는 또 1심 판결로 실제 부담 잠정금액인 1조원을 즉시 충당금으로 적립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3분기 적자 전환도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기아차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7868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44% 급락했다. 2분기 영업이익은 4040억원에 그쳤다. 기아차 주장이 맞다면 국내 시총 20위권 회사가 한 순간에 적자기업으로 전락하는 셈이다.

기아차가 가장 뼈 아픈 부분은 재판부가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데 있다. 신의칙 적용을 재판부가 받아들였을 경우, 통상임금에 상여금과 중식비가 추가되더라도 과거 임금까지 소급해 지불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재계 주장도 기아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면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은 점은 기존의 노사간 약속을 뒤집은 노조의 주장은 받아들여 주면서, 합의를 신뢰하고 준수한 기업은 일방적인 부담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으로 허탈감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예측치 못한 추가비용 부담으로 산업경쟁력이 약화될까 우려된다”는 입장을 내놨다.

노동계는 1심 결과를 반기면서도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했다. 한국노총은 법원이 판결한 지급 액수에 대해 ​노동자들의 청구 금액 중 일부만 통상임금으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이번 기아차 통상임금 재판은 소송 금액과 대상 인원 모두 사상 최대 수준인 탓에 전 산업계에 엄청한 후폭풍을 미칠 것으로 예상돼 왔다. 소송이 갖는 규모와 상징성 때문에 다른 통상임금 소송의 판례가 될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점쳐졌다.

한국경제연구원이 현재 노조와 통상임금 소송을 벌이고 있는 3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현재 평균 2.8건꼴로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이다. 100건이 넘는 관련 소송이 줄줄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재계 전체로는 30조원이 넘는 노동비용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기업에 막대한 비용부담을 일으켜 투자와 고용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경제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게 재계 주장이다.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은 통상임금 소송에 따른 임금상승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터져나온다.

반면 노동계와 일부 정치권에서는 이번 1심 선고로 현재 기형적인 임금 체계를 개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기업의 급여 구조는 통상임금 이슈에서 자유롭기 위해 온갖 명목의 수당을 붙인다. 임금은 올라가지만 수당 항목을 늘려 통상임금 부담을 벗어나기 위한 편법이다. 이에 따라 노사는 임금협상 때마다 초과근로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기본급 대신 상여금을 인상시켜 온 게 사실이다. 

 

통상임금의 딜레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임금체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재계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는 급여 근로자의 합리적 요구도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작 합리적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사법부는 모호한 잣대로 분쟁을 더 부추킨다.

 

이번 1심 선고에서도 신의칙에 대한 사법부의 잣대가 명쾌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소송' 판결에서 통상임금 논란을 정리하면서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갖춘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통상임금이 경영에 큰 타격을 준다며 과거 소급분에 대해 당시 합의를 지키라는 신의칙을 적용했다.  

 

하지만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에도 하급심 법원들은 뚜렷한 원칙 없이 신의칙 법리를 적용하고 있어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동일한 통상임금 사안이라도 심급에 따라 신의칙이 인정됐다가 부정되는 일들이 그동안 비일비재 해왔다.

신의칙 적용이 재판부 성향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불거지는 이유다. 각 기업의 재정 상태와 매출 실적을 따져 통상임금 부담이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이나 존립을 위협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에 따른 지표가 아닌 재판부마다 다른 주관적 판단을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번 기아차 1심 선고는 앞으로도 지리한 법정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결국 항소와 상고를 거쳐 3심까지 갈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법원이 최종적으로 어느 쪽 손을 들어주던 산업계와 노동계, 어느 한 쪽의 반발은 불가피하다. 통상임금은 일개 기업을 떠나 국가 경제에 미칠 파장은 물론, 국민 대다수인 급여노동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다. 

 

계와 노동계가 상생할 수 있는 지혜를 모으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도 쉽진 않겠지만 분란 소지가 다분한 통상임금에 대한 기준을 명쾌하게 정립해야 한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시급하다. 이번 기아차의 통상임금 1심 판결은 해법이 아니다. ​새롭게 문제를 풀어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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