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 바로 풀어야 병이 안 생긴다. 돈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는데, 요새는 그걸 ‘시발비용’이라 한다.

일러스트 STUDIO ONSIL

인스타그램에 모범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친구의 피드가 올라왔다. “오늘만큼은 도저히 지하철로 귀가할 수 없었다. 쾌적한 좌석에 앉자마자 벌써 기분이 나아진 듯”. 태그는 #시발비용. 이 태그를 누르자 옷, 구두, 모바일 결제창 등을 찍은 관련 게시물 8천여 개가 뜬다. 어감도 심상치 않은 시발비용이란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말한다. 일각에서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단발성 소비가 ‘텅장’을 초래할 것이라며 주의를 촉구하지만, 어차피 장기화된 텅장 상태에서라면 지금 당장의 내 상태를 환기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적어도 내일의 시작은 마이너스가 아닌 정상 게이지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해줄 가능성이 큰 시발비용에 우리는 자꾸 설득되고, 그래서 또 지불하게 된다. 이 칼럼은 시발비용을 절제하자거나, 쓰지 말자는 교훈을 주고자 기획한 것이 아니다. 기왕 쓸 거, 보다 널리 나를 이롭게 할 만한 방안을 살펴보자는 취지다. 지난 한 달간 당신이 지불한 시발비용은 무엇이었나?​

 

사진=나일론

 

700,000 

 

오사카 호텔과 항공료 힘들어도 보람이 있어 담당자로서 즐겁게 해오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상사가 부르더니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나에게 손을 떼라고 했다. 게다가 새로운 담당자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팀원이었다. 오래 미뤄왔던 오사카행 티켓을 그날 바로 결제했다. 30세, 남, 직장인​

 

​50,000

울 양말 점심시간 짬을 내 들른 편집 숍에서 뜬금없이 양말을 한 무더기 샀다. 양말을 보기만 해도 더운 여름에 이걸 산 건 마감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울 100% 양말을 보며 빨리 이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가을이 오기를 바라면서 잠깐 웃었다. 29세, 여, 에디터​

 

​16,900

사진=나일론

피자 한 판 원래 식사 시간이라는 게 없는 직업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고 불만을 품은 적도 없는데, 그날 어쩐지 저녁도 안 먹고 자정까지 일하는데 짜증이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24시간 야식집에서 피자 한 판을 시켜 해치우고 행복하게 잠들었다. 26세, 남, 포토그래퍼

 

​9,000

각질 제거기 마트에서 3천원짜리 각질 제거기를 샀다. 보통 샤워할 때 사용하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각질도 안 벗겨지고 자꾸 미끄러졌다. 아침이라 출근 시간에 쫓기며 낑낑대고 있는 내가 불쌍했다. 결국 점심시간에 굳이 드러그스토어에 들러 9천원짜리 고성능 각질제거기를 샀다. 어찌나 후련하던지. 33세, 여, 에디터

 

​840,000

한 달 평균 술값 지금 적으면서 처음으로 계산해봤다. 한번 술을 마실 때 보통 7만원 정도 쓴다. 평균 3차까지는 가니까. 택시비는 플러스 알파. 업무 스트레스가 심해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술을 마시니까 한 달에 84만원, 사실 90만원쯤 쓴다고 봐야겠지. 그 돈으로 여행을 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한 달에 한 번씩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딱히 이 돈이 아깝지는 않다. 31세, 여, 디자이너

 

​85,000

메모리 카드 클라이언트의 요청대로 수정 작업을 대체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더 시키면 이제 더는 못한다고 얘기하자 결심한 날이었는데, 예상대로 또 다른 영화를 거론하며 참고 수정을 요청했다. 평소 같았으면 데이터 정리를 했겠지만 그 작업마저 화가 나서 200GB짜리 메모리 카드를 질렀다. 200GB는 영화 100편용. 43세, 남, 영화 연출자​

 

​1,100,000

남미행 항공료 방학 동안 여행을 할지, 아르바이트를 할지 고민하다 돈을 좀 더 모으기로 결정하고 몇 군데 이력서를 냈다. 면접을 보고 최종 결정을 한 곳에 출근하기 이틀 전 사장님한테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자기 아들이 일해야 한다고. 덕분에 남미에 다녀왔다. 24세, 남, 학생

 

​450,000

30년산 위스키 한 병 주말 내내 출근해서 만든 리포트를 월요일에 보고했다. 보자마자 팀장님이 요즘 일 안 하느냐고 하시더라. 그런 말은 자주 들어도 익숙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퇴근하고 팀원이랑 술 마시러 갔다가 마지막 위스키 바에서 내가 쐈다. 보너스가 들어온 달이기도 했고, 기분 전환시켜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으니 괜히 뿌듯했다. 35세, 남, 마케터

 

​230,000

택시비 야근하고 지하철역 앞에 섰는데 집에 가는 길이 너무 멀어 보여서, 내 생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타인에 의해 소개팅을 하고 나와서, 아침에 버스에서 이상한 기사 아저씨를 만나서 등의 이유로 한 달에 쓰는 택시비. 28세, 여, 웨딩플래너

 

​200,000

하루 술값 군인 남자친구가 휴가 안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스트레스를 받아 친구들과 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돈이 없다고 거절. 그럼에도 이미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라 “내가 낼 테니 나와!”라고 말했다. 결국 20만원 탕진. 22세, 여, 대학생​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