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알쓸신잡 등 지식 전파 예능 인기…지식소매상 역할에 주목해야

이미지=김태길 에디터

민주화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유시민(58)은 도드라진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운동권으로, 지식인으로, 정치인으로, 행정가로 종횡무진 한 시대를 풍미해서지요. 그를 처음 세상에 알린 건 단연 ‘항소이유서’였습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구절은 유시민의 글을 매개로 더 큰 메아리를 얻었습니다.

그런 그가 1990년대 이후 자처해온 직함은 ‘지식소매상’입니다. 동서고금의 학자(지식도매상)들에게서 얻은 앎을 잘 요리해 소비자들에게 전달해준다는 의미죠. 그가 내놓은 책들의 성격이 이를 오롯이 보여줍니다. 지식소매상의 손끝 재능을 발휘한 겁니다. 그런데 환갑을 앞둔 그의 다른 재능을 발견한 건 출판이 아니라 방송입니다.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은 유시민을 위한 방송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방영 전에는 나영석 효과가 컸는데 이제는 유시민 효과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가 김영하, 뇌과학자 정재승,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만 유시민의 존재가 이 세 사람의 존재효과를 극대화하는 모양새입니다.

알쓸신잡의 애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이 재미와 교양을 모두 충족시켜준다고 말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각광받고 있다는 건 명징한 현실인 듯합니다. JTBC ‘썰전’의 애청자들도 비슷한 ‘시청효능감’을 증언합니다. 썰전을 보면 예민한 시사현안을 재미있게 알 수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교육 강사 설민석 씨를 스타덤에 올린 ‘어쩌다 어른’(무한도전이 설 씨를 스타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도 대표적인 지식예능입니다. 예능은 아니지만 몇 년 전 학부모 사이에서 아이들과 함께 영화 ‘인터스텔라’ 관람 열풍이 불어온 것도 비슷한 맥락일 테지요.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도 내정 직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화제가 됐습니다. 최근에는 TV조선이 ‘영웅삼국지’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홍보문구에 ‘역사예능’이라는 표현까지 썼더군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물리예능, 화학예능이란 말까지 등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현상에 긍정적 평가만 가득한 건 아닙니다. ‘지식의 연성화’, ‘전문성의 부재’를 문제 삼는 시각들도 있어서이지요. 설익은 지식이 예능이라는 포장지를 통해 너무 손쉽게 유통된다는 비판입니다.
 

토크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는 유시민 작가. / 사진=뉴스1

글쎄요, 기자는 그런 비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면서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대중은 무엇을 통해 지식을 습득해야 할까요? 학교? 책? 그런데 ‘지식의 최전선’인 출판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출판물 상당수도 지식을 연성화한 책입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원저 그대로 읽으면서 씨름하는 전문학자의 존재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막스 베버의 생각을 잘 요리해 나름의 의견을 붙여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도 필요합니다.

지식의 연성화가 문제라면 대안은 대중이 직접 매일매일 전문학자들의 학술논문을 읽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평생 재교육’의 나라가 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그래서 매개자가 중요해집니다.

사실 전문학자들이 생산하는 학술성과가 대중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생각도 고정관념입니다. 강연을 통해, 책과 잡지, 신문을 통해, 혹은 최근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학술지식들이 유통됩니다. 그런 지식들이 학술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긴 시간을 통해 전문학자들의 성과는 대중 사이에서 교양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게 우리가 목도해온 지난 근대 계몽의 역사입니다.

이 중간 고리에 자리 잡고 지식을 잘 요리해내는 인물들이 유시민의 말마따나 지식소매상이지요. 혹은 지식매개자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핵심역할을 예능 프로그램이 맡고 있을 뿐입니다. 굳이 책과 TV프로그램의 위계를 나눌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고백하자면 기자들도 매개자입니다. 그래서 이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이번 주말에는 제 취재영역과 관련된 논문이라도 여러 편 훑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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