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 고발 없었으면 묻혔을 것…촛불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요새, 희망 있다”

13일 오후 본지와 인터뷰 중인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 사진=최형균 기자

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으로 재벌개혁을 천명했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삼성이다. 정경유착, 편법 증여, 독과점 등 재벌 구조가 가진 온갖 적폐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 삼성이다. 지금은 삼성과 한국 경제를 냉철하게 분해할 날카로운 메스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시사저널e는 ‘밖에서 본 삼성’ 시리즈를 시작한다. 스마트폰‧반도체‧인공지능에서 거시경제‧재벌개혁‧노동에 이르기까지 경제와 사회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들을 고루 만나고자 한다. 그들의 프리즘을 빌려 새 정부 출범 후 삼성과 재벌혁신의 길을 모색해본다.[편집자 주] 

 

2000년 6월 29일. 법학교수 43인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특별배임죄로 검찰에 고발했다. 43인은 이 회장이 삼성에버랜드 등 계열사의 배임성 신주특혜발행을 통해 이재용 당시 전무로의 불법승계를 ‘진두지휘’했다고 문제 삼았다. 이 최전선에 40대 중반의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 곽노현이 있었다. 지금은 ‘前 서울시 교육감’으로 훨씬 더 유명한 그 곽노현이다. 17년 후 곽노현은 “마치 김재규가 유신체제 심장을 겨눴듯이 나도 한국 재벌체제의 심장을 비수로 꽂는다는 의지를 다졌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0년 가까운 지루한 법정공방이 이어졌다. 결과는 43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은 이건희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선고로 3세 승계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곽노현과 42인의 역사적 고발은 이제 그들의 회고담 속에서만 잠자야만 하는 걸까?

대법원 판결로부터 8년 후 ‘총수’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됐다. 그를 포함한 재벌총수 9인이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왔다. 만약 삼성에버랜드 고발이 없었다면 훗날의 이 역사를 우리는 목격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징검다리 교육공동체’ 이사장이 돼 기자와 만난 곽노현은 “삼성은 난공불락이 아닌 소문의 벽”이었다며 “촛불시민의 힘으로 요새를 무너뜨렸다”고 역사적 의의를 평가했다.

소문의 벽. 맞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소설가 이청준의 그 유명한 소설 제목이다. 실체의 벽이 아닌 무형(無形), 즉 소문과 편견으로 진실을 압박하는 벽 말이다. 보이지 않아 두려움을 자아내지만 막상 전면전을 펼치니 허물어져버리는 그런 벽이다. 부러 애써 난공불락임을 스스로 과장해 온 벽이 삼성이었다는 얘기다. 곽 전 교육감을 13일 오후 서울 삼청동 그의 연구실에서 1시간 40분 간 만나 인터뷰했다. 총 3편에 걸쳐 그와의 생생한 대화를 가감 없이 전한다.

법학자로서, 삼성의 편법승계와 싸웠던 실천가로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으로까지 이어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어떻게 관찰했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재벌게이트이자 삼성게이트다. 지난해 청문회에 재벌 총수 9명이 나란히 불려나왔다. 30년 전 5공 청산 재벌청문회가 떠올랐다. 민주화 이후 30년 간 우리사회가 무엇을 했길래 이제 와서 데자뷔(Déjà Vu)를 경험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과 복지, 저녁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민낯이 (게이트를 통해) 드러났다.

그럼 30년 만에 재벌총수들을 다시 불러 세운 그 힘이 어디서 왔나? 국회? 행정부? 사법부? 모두 아니다. 촛불시민의 힘이다. 5공화국 청문회의 동력도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에서 왔었다. 그간 우리사회는 대의민주주의의 힘으로 재벌권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개탄했을 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제 시민주권의 힘으로 경제 부정의, 정경유착, 부패비리 문제를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참여정부 시절에 비해 미흡한대로 재벌 감시운동의 경험과 실력도 쌓였다.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촛불의 힘이 정경유착을 뿌리 뽑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보나?

촛불혁명이 우리나라 법의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게 있다. ‘권력자는 공사구분을 해야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이 뭉치면 폭력 없이 촛불로도 불의한 권력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간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서로 유착해 ‘이익은 사유화하고 위험은 사회화’해왔다. 시민들은 앞으로 이 유착과 부패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줬다. 이제 시민의식의 변화를 담을 강력한 반부패 제도개혁, 특히 검찰과 법원, 규제기구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특검이 다른 죄도 아닌 뇌물죄를 적용해 기소했다. 어떻게 전망하나?

그간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에게 사법특권을 제공해왔다. 불기소특권이나 솜방망이 처벌이 대표적이다. 그 대가로 정치권력은 돈을 받았다. 뇌물과 특권의 교환이다. 뇌물죄 적용은 너무나 당연하다. 마침 지난 8일 법원에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공히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지 않았나. 공범에게 뇌물죄를 적용했기 때문에 (이 부회장 재판에도) 분명히 파급효과가 있을 거다.
 

곽 전 교육감은 촛불시위를 통해 삼성이 난공불락이 아닌 소문의 벽이었을 뿐이라는 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 사진=최형균 기자

문제의 근원을 따져가다 보면 삼성에버랜드 CB 헐값발행 사건과 만나게 된다. 고발 날짜가 2000년 6월 29일이었다.

삼성에버랜드 편법상속이 일어난 시기는 1996년 12월이었다. 5개월이 지나 1997년 5월에 이 문제를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동료 법학교수들과 함께 2000년 6월 29일 검찰에 고발했다. 군사쿠데타 세력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날이 1987년 6월 29일 아닌가. 우리는 삼성에버랜드 CB헐값발행 사건을 삼성경제권력 대물림을 위한 총수의 ‘친위쿠데타’라고 봤다. 이들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내겠다는 다짐으로 6월 29일에 고발을 단행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법의 심판을 눈앞에 둔 현재 상황에서, 당시 법정투쟁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하나?


이때의 고발이 없었다면 그 후 삼성문제는 잠잠해졌을 것이다. 삼성SDS는 당시 상장기업은 아니지만 우리사주조합 종업원주주들이 장외에서 활발하게 보유주식을 거래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실거래가가 형성돼 있었다. 이 사실을 입증한 참여연대가 삼성SDS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주주총회에서 문제 삼고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에 고발했다. 누가 봐도 장외 실거래가와 특혜발행가 차이가 컸다. 공정위는 과징금을, 국세청은 증여세를 부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삼성SDS는 삼성 편법상속 문제에서 곁가지였다. 삼성경영권 상속에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삼성에버랜드는 달랐다. 편법상속 문제의 심장이었다. 비상장인데다 주주구성이 전원 계열사 아니면 총수일가였다. 이 때문에 형사처벌 말고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 없었다. 삼성에버랜드 지배권상속사안은 삼성SDS 지배권상속사안과 성격과 구조, 수법이 동일했다 그래도 공정위와 국세청이 절대 나서지 않았다. 만약 당시 법학교수들이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국가기관도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

고발 덕에 ‘삼성공화국’이라는 낱말을 시민들이 알게 됐다. 당시 정부가 삼성의 편법적 행태를 바꿀 의지가 있는지와 같은 논쟁도 일각에서 진행됐었다.

사실 그 논쟁의 축은 잘못 형성된 것이다. ‘삼성을 잡을 수 있나 없나’라는 논쟁은 삼성에 난공불락 지위를 주고 시작하는 것 아닌가. 되레 삼성에게 우호적인 프레임이다. 적어도 경영권 상속과 관련해서는 ‘난공불락이 아니라 소문의 벽’으로 둘러싸인 편법의 성채일 뿐이라고 논쟁했어야 했다. 이번에 보여주지 않았나? 촛불의 힘으로 요새를 무너뜨렸다. 결국 허공과 불의 위에 떠 있는 권력에 불과했다. 법적으로 워낙 취약했기 때문에 삼성 측이 기를 쓰고 정치권과 법조계, 엘리트관료와 언론, 학계에 기름칠을 해온 셈이다. 그게 이어져서 정유라의 최고급 말과 승마장 지원까지 이어진 거 아닌가.

법정투쟁은 참 길었다. 길었던 만큼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검찰이 법학교수들의 고발을 세 차례나 기각하더라. 서울지검이 불기소했고 서울고검은 항고를 기각했다. 대검도 재항고를 기각했다. 나는 법학교수 고발이후 10년 가깝게 에버랜드사안에 대해 시민사회에 알려왔다. 검찰과 법원을 압박하는 심포지엄과 토론회를 열고 기고를 이어갔다. 결국 노무현 정부 검찰이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기소했다. 그러나 ‘몸통’ 이건희 회장은 놔두고 ‘깃털’ 에버랜드 사장과 전무만 기소했다. 그래도 검찰수사 덕에 에버랜드 편법상속 실체가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었다.

1심과 2심에서 배임 유죄 판단을 받아냈다. 기뻤다. 하지만 검찰은 이건희 회장을 추가로 기소하지 않았다. 결국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11월 양심고백을 했다. 그러자 삼성특검이 임명돼 이건희 회장을 에버랜드 건과 SDS건으로 기소했다. 당시 이 회장은 2004년 이래 공소시효가 중단돼있었다. 에버랜드 사장과 전무 등 공범이 막판에 기소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2009년 상고심에서 이건희 회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에버랜드는 대법원에서 6대5로 가까스로 무죄를 받았다. SDS는 9대1로 압도적 유죄였다. 에버랜드가 유죄로 나왔다면 범죄행위로 경영권 상속이 된 셈이라 큰 사단이 일어났을 거다. ‘황제’를 흠모해온 대법관들이 어처구니없는 가짜 법리를 만들어내 무리하게 봐줬다. 그래도 삼성 측 입장에서는 초라한 승리였다. 구조와 성격이 똑같은 두 사건의 결과를 합쳐보라. 유죄 14 대 무죄 7이다. 말하자면 67%로 압도적 유죄인 셈이었다.

(⑤ 곽노현 前 서울시 교육감 인터뷰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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