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부재를 소환해 존재로 만드는 동력

취업준비생으로 살다보니 눈물이 많아졌다. 시험공부하기 전에 생전하지 않던 청소하듯, 사회인이 되기 전에 추억을 곱씹게 마련인 걸까. 오랜만에 혜화역을 갔더니 대학교 1학년 때 대학로 연극 다큐를 찍겠다고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던 내가 보였다. 이런 기시감은 전 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마냥 불쑥 찾아온다.

다만 그리움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다. 25살쯤엔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해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잠들었던 나날들. 아프고 힘들 때 친구들과 한껏 울며 취할 수 있었던 밤들.

눈물이 나길래 그저 슬픈 감정인 줄 알았다. 눈물에게 속은 셈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눈물을 흘리면 자신이 ‘슬픈 영화’를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고 말했다. 눈물의 의미를 신파로 치환하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과도 같았다. 눈물을 설명하는 감정들은 많다. 이는 ‘거리감’으로부터 발생한다. 거대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미물로 전락하고, 그 때 경이로움이 생기듯. 대상과의 거리가 크면 클수록, 즉 결핍이 크면 클수록 눈물이 난다.

록(Rock) 음악이 좋아서 새벽까지 펍(Pub)에서 일하던 22살의 나. 여윳돈을 모아 읽고 싶던 책을 구입하던 나. 여러 사람들과 걷고 먹고 자고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 지금 여기의 삶과는 다른 그곳의 삶. 너무나도 나는 내가 보고 싶다. 늦은 밤 ‘자니?’처럼 어설픈 고백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 결핍은 주로 부재로부터 나온다. 미니멀리즘과는 한참 먼 나는 무언가를 버리는 데 서툴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친구들의 편지는 서랍 한켠 빼곡히 쌓여있다. 그 편지를 몰아 읽는 일이 버릇이 된 만큼 추억을 자꾸 열어보고 계속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있어야 결핍이 채워진다. 즉 부재가 아닌 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어야 코가 근지러울지언정 울지 않을 수 있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대학생활을 회고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식이 뚝 끊긴 초등학교 단짝의 편지를 읽는 것보다 더 거리감이 드는 건 과거의 나다. 낯설다. 아무래도 취업준비를 위해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단단한 마음이 필요해서였으리라. 이런 단절감이 심하게 드는 날이라면, 아마 울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난 슬프지 않다. 추억의 힘은 내게 소유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의 부재는 추억으로 채우면 될 일이다. 언제든지 소환해서 그 때의 나를 상상할 수 있다. 다만 그 상상력이 바닥날 만큼 지쳐버린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 취준생치곤 행복하다는 방증이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소설의 메시지처럼 과거의 내가 늘 그곳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신촌 거리에, 1년 남짓 살았던 북악산 근처 쉐어하우스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과 있던 그 시공간에. 그 추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면, 자기소개서 앞에서 울어버리는 일을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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