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가지 경제민주화 공약 무산…새 정부 실천 주목

뇌물죄 혐의로 법정에 선 박근혜 전 대통령의 5년 전 대선 화두는 경제민주화였다. 박 전 대통령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문제 삼으며 개혁의 칼을 뽑겠다고 공언했다. 클라이맥스는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김종인 전 의원 영입이었다. 김 전 의원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과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아 총선대선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주도했다.

 

그렇게 나온 공약은 백화점식 나열이라 할 만큼 화려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선 한 달 전인 201211월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이 회견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경제민주화 실천을 위해 5대 분야 35개 과제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조금 길지만 박근혜 당시 후보가 이 자리에서 꺼낸 약속들을 살펴보자.

 

특수고용직 종사자 권익보호,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도입,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 폐지, 중소기업 적합업종 실효성 제고, 가맹사업자 불공정행위 근절,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에 대한 형량 강화, 대기업 지배주주·경영자에 대한 사면권 행사 제한, 일감몰아주기 등 부당내부거래 규제 및 부당이익 환수, 대기업집단 신규순환출자 금지, 사외이사 경영감시기능 강화, 금융보험사에 대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금산분리 강화,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 의결권 행사 강화.

 

야당후보의 약속이 아니다. 시민단체의 요구도 아니다. 집권여당 후보가 굳이 먼저 나서 약속한 내용이다. 대기업집단, 아니 삼성이 당장 타격을 입을 정책이 상당수였다. 결과는? 모두가 알 듯 지켜진 걸 찾기 힘들다. 후보시절 화려하게 채색된 칼집을 과시하던 박 전 대통령은 막상 집권하고 나서는 칼을 꺼내지도 않았다.

 

총수에 대한 사면권 행사 제한? 이재현 CJ 회장은 수감생활을 지속하면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유로 지난해에 풀려났다. 이 회장은 사면 1년도 안 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감몰아주기로 스스로의 살을 찌운 대기업을 찾는 건 매우 손쉬운 일이다. 가맹사업자의 갑질문제는 5년 내내 언론매체를 뜨겁게 달궜다. 사외이사는 여전히 거수기 노릇만 하고 있다.

 

하이라이트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다는 약속의 결과다. 국민연금공단은 의결권 강화는커녕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손실을 자초했다.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 배임혐의로 기소됐다. 문형표 전 이사장은 조사 중 긴급체포 돼 여전히 구속신세다. ‘삼성공화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공여로 구속됐다. 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 신세로 전락했다.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일 의결권 행사가 약속대로 강화됐다면? 아마 박 전 대통령의 임기는 잘 마무리됐을 거다.

 

보궐선거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개혁 의지는 분명한 것 같다. 경제팀에 내정한 인사들 면면이 의지를 오롯이 보여준다. 첫 단추 끼우기에는 성공한 셈이다. 노무현 정부가 삼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며 새 정부 경제팀에 경계심을 낮추지 않던 일각의 학자들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반면 경제단체는 고요하다. 입장을 물어도 공식적으로 할 말은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4대기업은?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최선이라는 답만 되뇌고 있다. 관료사회는? 발 빠르게 새 정부 기조에 맞춰갈 채비를 마쳤다. ‘실세 공정위원장의 등장에 되레 반기는 목소리도 감지된다. 경제개혁에 반발할 목소리가 극도로 축소됐다는 얘기다.

 

그래서다. 개혁을 추진할 환경은 노무현 정부 초기보다 훨씬 좋아졌다. 새 설계도를 짜며 시행착오를 겪을 이유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5년 전 박근혜 대선후보의 약속만 지키면 된다.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차고 넘친다. 혹여나 야당이 강력 반발하면? 박 전 대통령의 18대 대선 경제공약집을 보여주면 된다. 이제 남은 건 실천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혁을 위한 칼을 칼집에서 실제로 꺼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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