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칼럼
광주를 다시 적(敵)에서 아(我)로 가져오기
  • 임슬아 칼럼리스트()
  • 승인 2017.04.2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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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슬아의 취중진담

‘뭔디’, ‘있냐’ 고등학교 동창들과 나누는 대화에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하는 단어들이다. 벌써 6년 동안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광주 사투리 대잔치다. ‘화장실 다녀올게!’ 화장실 칸 너머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우리 옆 테이블 애들 사투리 들었어? 경상도 애들은 귀엽던데. 진짜 전라도는 깬다. 드세.”

 

사적인 경험뿐만 아니다. 보수 커뮤니티 중 최강자는 광주를 ‘빨갱이’라며 비하하지 않는가. 그 사이트는 호남과 여자를 혐오한다. 나는 공교롭게도 두 곳에 양발을 걸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람을 만나면 광주 사람인 걸 말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검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광주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선 사투리를 숨겼다. 고향 콤플렉스가 생긴 셈이다. 광주는 ‘아(我)’에서 ‘적(敵)’이 됐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머니-아버지-아들’이란 삼각형으로 구성돼 있다. 부부관계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는 아내라는 하나의 선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며 두 번째 선을 만든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페니스로 상징화하면서, 어머니가 권위 없는 이유를 페니스의 부재에 찾는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페니스를 동경하게 되면서 아들과 아버지 두 점이 만나 세 번째 선을 만든다.

콤플렉스 극복은 새로운 삼각형을 만들어버리거나, 삼각형을 깨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전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재생산한다. 아들이 아내를 맞이해 자신이 또 다른 아버지가 됨으로써,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다. 후자는 아버지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결해 삼각형을 해체시켜버리는 선택지다. 그러나 삼각형을 재생산하는 방법은 콤플렉스의 완전한 극복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두려움, 결핍이 사라지지 않고 아들의 무의식으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고향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방법도 두 가지. 서울라이트(Seoulite)처럼 행동하거나, 고향을 부끄럽게 만드는 상황과 대결하는 것이다. 권위 없는 어머니와도 같은 광주를 버리고, 권위 있는 서울말을 쓴다고 한들 나의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고향은 나의 과거다. 내가 성장한 곳이다. 그럼 모범답안은 ‘대결’이다. 카프카가 권위적인 아버지와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명령은 치욕이었다는 내용”을 편지로 남겼던 것처럼 말이다.

방법론을 묻는다면 다시 카프카로 와보자. 카프카가 아버지와 대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소년기와 독립적 성인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 아닐까. 카프카가 ‘아들’이라는 고정점을 이탈한 결과, 삼각형은 깨진다. 독립적 성향으로 인해 아버지와 자신을 분리하는 ‘자기객관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이’는 아버지, 어머니의 권위-종속 관계를 깰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서울과 지방이라는 권위-종속 관계를 깨보자. 지방과 서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사투리를 숨기지 않는 것으로서. 카프카의 편지쓰기처럼,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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