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영화 크랭크인·‘여의도 텔레토비’ 시즌2도…서슬 퍼럴 때는 국뽕 영화로 빈축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한 영화관의 '인천상륙작전' 상영관에서 관람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뉴스1

스스로 ‘문화기업’을 표방하는 CJ는 이제 완연하게 탈(脫) 박근혜 행보를 시작하는 걸까. 일단 최근 상황을 두고 보면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시기 ‘인천상륙작전’ 등 보수색 짙은 영화로 ​국뽕​ 논란까지 자극했던 CJ E&M은 전격적으로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다룬 작품을 투자배급하겠다고 밝혔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영화의 줄기다. 캐스팅 규모도 화려함 그 자체다.


움츠러들었던 정치풍자에도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2012년 대선 직전 방영한 ‘여의도 텔레토비’로 한동안 입길에 올랐던 tvN의 SNL코리아가 칼을 갈았다. 거침없는 풍자의 날이 더 예리해졌다. 여의도 텔레토비는 영화 ‘광해’, ‘변호인’과 함께 CJ에 대한 정권 차원의 압력을 상징하는 콘텐츠로 꼽힌다.

때마침 검찰도 공정위가 CJ CGV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고발한 건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CJ가 박 정부의 ‘문화융성’ 기조에 적극 보조를 맞춰왔던 걸 고려하면 무조건적인 피해자로 보기에도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3일 영화투자배급사 CJ E&M은 6월 민주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가제)이 주요 캐스팅을 확정 짓고 4월에 크랭크인한다고 밝혔다. 장준환 감독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이후 5년 만에 메가폰을 쥔 작품이다.

CJ E&M은 이 영화에 대해 “1987(가제)은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특히 장편 상업영화로 6월 민주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건 이번 영화가 처음이다”라고 밝혔다.

캐스팅은 최근 국내에 나온 영화 중 가장 화려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계 안팎에서는 캐스팅 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쓰였으리라 보고 있다. 제작비 자체가 블록버스터급으로 뛸 수 있다는 얘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을 이끄는 공안경찰 박처장 역할은 배우 김윤석이 맡았다. 박 처장에게 충성을 다하는 조반장 역할은 박희순의 몫이다. 부당하게 진행된 사건 처리 과정을 의심하는 부장검사 역할은 하정우가 연기한다. 사건 실체를 파헤치는 기자 역할에는 이희준이 캐스팅됐다.

끝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 핵심 인물이자 재야인사 역할로는 설경구가 나온다. 그들을 도와주는 교도관 역할은 유해진이 연기한다. 민주화 운동에 휘말리게 되는 대학생들 역할로는 강동원, 김태리가 캐스팅됐다. 고(故)박종철 열사 역할은 여진구가 맡는다.

CJ E&M이 최근 몇 년 간 주력으로 투자배급해왔던 영화를 고려해보면 1987(가제)의 등장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난해 CJ E&M의 텐트폴(주력작품)은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직접 서울 시내 한 영화관을 찾아 이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여당 지도부도 단체관람했다. 김종덕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함께 이 영화를 단체로 관람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지난해 8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극장에서 'KLO 8240 유격 백마부대(켈로부대)전우회'와 유족들을 초청해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기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뉴스1

제작자인 정태원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는 개봉 당시 기자회견에서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가 겪은 참상을 통해 우리 젊은이들이 강한 안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밝히면서 애국심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 탓인지 ‘국뽕’(애국심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영화) 논란도 촉발됐다. 앞서 CJ E&M은 2014년에 ‘명량’, 2013년에는 ‘국제시장’ 등 애국코드를 강조하는 대작들을 스크린에 내걸었다.

그런 CJ E&M이 이번에는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진영에 소구력이 높은 소재로 돌아온 셈이다. 이에 대해 한 영화계 인사는 3일 오전 “(1987 크랭크인) 소식을 듣자마자 ‘변호인’이 떠올랐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영화 뿐 아니라 방송부문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CJ E&M이 운영하는 방송사 tvN은 지난달 25일부터 ‘SNL코리아 시즌9’ 방영을 시작했다. 특히 1일 방송된 ‘미운우리프로듀스101’(이하 ‘미우프’)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미우프는 역시 CJ E&M 소속인 M-NET ‘프로듀스 101’을 패러디해 각 정당의 대선 경선을 풍자하는 콘텐츠다. 사실상 여의도 텔레토비 시즌2로 꼽힌다. SNL의 터줏대감 신동엽은 “지난 대선 때 여의도 텔레토비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 다시 여의도 텔레토비를 할 수는 없고 미우프를 했는데 볼만 하셨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풍자의 칼날은 여의도 텔레토비보다 더 예리해졌다. 1일 방영된 미우프에서는 투게더엔터테인먼트 문재수(김민교 역) 안연정(정성호 역) 이잼(권혁수 역), 피플컴퍼니 안찰스(정상훈 역), JYD엔터테인먼트 레드준표(정이랑 역), 바르다뮤직 유목민(장도윤 역), 정엔터테인먼트 심불리(이세영 역)등 주요 7인의 대선 후보들을 겨냥한 연습생들이 모두 등장했다.

안찰스는 “호남서 실시한 경연에서 표를 많이 받았다”며 “이게 문재수를 이기라는 호남의 명령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문재수는 안연정, 이잼에게 “오늘부터 우리는 네거티브하지 말자는 의미로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을 미션곡으로 하자”고 언급하기도 했다.
 

SNL코리아 시즌9의 한 장면. 안희정 충남지사를 패러디한 안연정 캐릭터. / 사진=관련화면 캡쳐.

파면결정 후 구속수감 된 박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도 있었다. 레드준표는 “이게 다 얼마 전 계약 해지된 여자 선배 때문이다. 춘향인 줄 알았는데 뽑아보니 향단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의 말을 그대로 활용했다.

‘문재수’ 역할을 하는 배우 김민교는 지난해 11월 SNL코리아 시즌8에 등장해 비선실세 최순실 씨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최씨 출두 당시 해프닝을 풍자했었다. SNL이 연이어 풍자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2일에는 검찰이 공정위의 CJ CGV 고발 건을 불기소 처분한 사실이 밝혀졌다. 함께 고발된 롯데시네마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는 CJ CGV와 롯데시네마가 계열사 또는 계열사가 만든 영화에 스크린 수, 상영 기간 등을 유리하게 제공하는 불공정거래를 했다며 고발된 사건을 지난달 말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 측은 “CJ CGV가 계열사 밀어주기가 아니라 자사의 영업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스크린 등을 배정한 것으로 봤다”며 “계열사에서 만들지 않은 영화도 흥행이 예상되면 큰 상영관을 배정했다”고 밝혔다.

CJ와 롯데 모두 문화사업과 관련해 박근혜 정부로부터 미운털 박혔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구속기소하며 작성한 공소장에는 “친노 계열 대기업(CJ·롯데)이 문화·영화 분야 모태펀드 운용을 독식하는데 문화체육관광부가 독립성을 이유로 이를 용인하는 것은 문제”라고 적혀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CJ가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 기조에 적극 보조를 맞춰왔던 걸 고려하면 무조건적인 ‘피해자’로 치부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내놓는다. 실제 CJ가 신한류 육성을 명분삼아 고양시 한류월드 부지에 만드는 K-컬처밸리 기공식에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었다. 또 박 전 대통령은 서울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문화창조융합벨트 출범식도 찾았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계 인사는 “CJ가 지금은 김기춘식 문화 공안정치의 피해사례로 평가받고 있지만 구분할 건 구분해야 한다. 가령 공정위가 과징금 72억원을 부과하고 검찰에도 고발했던 스크린광고 일감몰아주기 같은 건은 시민단체가 먼저 나서서 문제제기한 것”이라며 “문화계 내에서 공룡지위를 가진 탓에 생겨난 폐해까지 모두 정권에 의한 탄압으로 도매금 취급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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