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임당의 면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생각나는 역사 속 위인을 떠올려보자. 이순신, 세종대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그리고 율곡의 어머니이자 뛰어난 예술가로 이름을 날린 신사임당이 떠오르지 않는가.

 

유교 문화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여자로 태어나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임당이 500년 전 조선 땅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남길 수 있던 배경에는 딸에게도 기회의 장을 펼쳐주고 재능을 소중히 여긴 가족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을 살고 있는 지금의 부모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사임당의 유년기, 그리고 자애로우면서도 강단 있는 성품으로 살뜰하게 가정을 돌보며 자신의 꿈을 실현한 슬기로운 여성 사임당의 삶을 살펴보았다.

 

사임당의 유년기 

一. 어쩌면 조선 최초의 알파걸

 

행복했던 유년, 전폭적인 지원이 사임당을 만들었다.

 

사임당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로 부모,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1504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어린 시절을 줄곧 외갓집에서 보냈다. 사임당의 어머니가 무남독녀이기에 편찮으신 모친을 모시기 위해 강릉에 내려와 있었던 것. 사임당의 아버지는 500리 길은 족히 되는 한양 집과 강릉을 오가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유하고 너그러운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무엇보다 영민한 딸을 애지중지하였다. 

 

사임당이 태어난 집안은 딸들에게도 글공부를 시키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가풍을 지닌 집안이다. 아마 이 점이 사임당의 삶이 그 시대의 다른 여성들과 다를 수 있었던 이유일 터이다. 어린 시절 외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임당은 여섯 살 되던 해부터 외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사임당뿐 아니라 언니와 여동생들도 함께 글공부를 했다.
 

여자아이들은 으레 바느질과 집안일을 배우던 조선시대 관습을 생각하면 드문 일이었다. 사임당은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스승 없이 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재주가 범상치 않아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하였다. 마을에 큰 잔치가 열린 날, 손님으로 온 부인이 빌려 입고 온 치마에 얼룩이 묻었다며 울상을 짓자 순식간에 탐스러운 포도 알을 치마폭에 그려낸 일화는 유명하다. 열아홉 나이로 이원수와 혼인하기 전까지 사임당은 유복한 집안에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경전을 읽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한양도 아닌 시골이었지만 종이와 물감을 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버지 신명화는 벗들에게서 좋은 그림을 빌려와 보여줄 정도로 딸의 재주를 아꼈다. 또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슬쩍 딸아이의 그림을 보여주며 자랑하였다. 딸의 영특한 재주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기꺼이 조력가가 되어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사임당이 있는 셈이다. 어쩌면 사임당은 시대를 앞선 최초의 알파걸, 아버지 신명화는 둘도 없는 조선의 ‘딸바보’였는지 모른다.

 

二. 시집살이 대신 처가살이를 택하다
처가살이가 가능했던 풍속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한양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임당은 어린 시절 한양이 아닌 강릉 외갓집에서 성장하는데, 사임당이 태어난 15세기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아직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풍습이 남아 있던 시대여서 가능했다. ‘남귀여가혼’이란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른 후 그대로 처가에 살다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다. 일종의 처가살이인 셈인데 사임당의 어머니가 무남독녀이기에 더욱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 풍습은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딸만 있는 집의 경우 딸들 중 하나를 아들처럼 여겨 결혼해도 친정집에서 살 수 있게 하였으며, 16세기 사대부 여성들은 친정 재산도 함께 상속받고 상황에 따라서는 호주 노릇도 하였다. ‘장가간다’는 말도 장인·장모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시집가서 바로 시댁에 들어가 사는 풍습,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남녀칠세부동석,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 여자가 똑똑하면 박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착된 유교적인 여성관이다. 다행히도 비교적 자유로운 시대 분위기 덕분에 사임당의 어머니는 오랜 기간 친정에 머물 수 있었고 당시 여자들이 겪었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마음 편히 자식들을 돌볼 수 있었다.

 

※ 독박육아 말고 공평한 육아가 필요한 이유


조선시대처럼 호된 시집살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존여비 문화가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학습되어온
성 역할과 관습, 사회적 분위기 탓에 육아는 물론 가사일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여자, 엄마의 몫’이다. 

 

지난 1월에 발표된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성의 하루 가사 노동 시간은 19분인 반면 여성은 자그마치 140분에 달하는것으로 나타났다. 무려 7배나 차이가 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데이터가 부부가 똑같이 일을 하는 맞벌이 가정의 데이터라는 점이다. 

 

신사임당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출가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 거주하며 일반 여성들이 겪는 육체적 분주함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아란 남편이 아내를 ‘돕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함께 ‘육아의 주체’가 될 때 모두가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내  엄마 여자로서의 사임당

 

一. 신사임당의 이름 찾기 프로젝트
사임당이 강릉댁, 북평댁이 되지 않았던 이유

 

흔히들 사임당의 어린 시절 이름을 ‘인선’으로 알고 있다. 이는 백과사전에도 종종 올라가있지만 사실 어떤 문헌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한 문학책에서 사임당의 어린 시절 이름을 ‘인선’이라 칭했는데 이후에 나온 문학작품에서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고,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며 마치 실제인 양 기록된 학문적 오류라고 한다. 그 시절 여자의 이름은 기록에 남기지 않는 것이 법도였고 이는 사임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역사에 남을 뛰어난 예술가이자 인재였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그러나 사임당은 이름 대신 당당히 호를 가졌다. 붓글씨와 그림 그리기에 능했던 어린 소녀는 낙관에 새길 호가 필요했고 고민 끝에 ‘사임당’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 사임당은 ‘태임을 본받다’라는 뜻이다. 중국 주나라의 태임 부인은 어질고 뛰어난 임금 문왕의 어머니로 지혜롭고 슬기로워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사임당은 일찍이 글공부를 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총명하였기에 자신이 여자의 몸으로 과거도 볼 수 없고, 뜻을 펼칠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좌절감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민하고 당찬 소녀는 어린 나이에 뜻을 세우고자 스스로 사임당이라 호를 지어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호를 갖는다는 건 남자들 세계에서는 일상적이지만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뜻을 세워 당호를 지었다는 건 그녀의 당찬 성격을 보여주는 동시에 스스로를 당당히 세상에 드러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왕비조차도 민희빈 강씨(소현세자비), 정순왕후 김씨 등으로 불린 걸 감안하면 그녀가 자아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그 시절 평범한 여염집 아낙처럼 강릉댁·북평댁으로 불리지 않고 사임당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덕분이다.

 

※ 혹시 엄마가 되고 이름을 잃어버리진 않았나요?


유년기, 학창시절, 연애시절 그리고 직장시절까지는 부모님이 지어준 예쁜 이름으로 불렸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자신의 이
름으로 불릴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특히 다니던 직장을 관두거나 바쁜 일상에 친구들하고도 교류가 끊기고 학부모의 세계
로 들어서게 되면 대부분 일상이 ‘아이’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때부터 내 이름보다는 ‘○○ 엄마’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린
다.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에서조차 스스로 ‘○○마미’, ‘○○맘’이라고 닉네임을 짓는다.


누군가의 아내, 사랑하는 아이의 엄마라는 타이틀도 분명 내 일부지만 그러면서 오롯이 나였던 자아를 잃어가는 건 아닐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름을 남기는 것조차 어려웠던 조선시대의 여인이 아니지 않은가. 나부터 ‘내 이름’
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나다운 엄마’가 되는 길은 아닐까. 지금 당장 이웃집 엄마를 ‘○○엄마’라는 호칭 대신 애정을 담아 ‘○○씨’, ‘○○언니’라고 이름 불러주는 작은 실천을 해보면 어떨까.

 

二. 홈스쿨링 1호, 사임당의 자녀교육법
모든 자식이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모든 자식이 제각기 훌륭했다

 

사임당은 일곱이나 되는 자녀를 서당에 보내지 않고 스스로 가르쳤다. 지금으로 치면 집에서 홈스쿨링을 한 셈인데, 요즘 같은 세상이야 도서관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참고할 학습 자료도 많다지만 그 시절에 쉬웠겠는가. 사임당이 직접 사서삼경을 가르쳤다는 것은 그만큼 충분한 학식을 지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심지어 아들인 율곡조차 학문에 있어 자신의 스승은 어머니뿐이라 했으니, 얼마나 위대한 선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임당의 큰딸 매창은 그림에 능했고, 막내아들 이우는 시서화는 물론 거문고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우를 두고 ‘시서화금(詩書畵琴)의 사절’이라 부르곤 하였다. 이렇듯 학문이면 학문, 예술이면 예술에 두각을 보이는 자식들이 있었기에 사임당을 자식농사에 성공한 어진 어머니로 여긴다. 하지만 일곱 자식 모두가 뛰어났던건 아니다. 큰아들 이선은 어릴 때부터 몸이 붓는 병(부증)을 앓았던 탓에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벼슬자리를 얻었고 혼기마저 놓쳐 사임당이 세상을 뜬 다음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요즘 부모들의 워너비상이라 할 수 있는 ‘우등생’은 셋째 아들 율곡뿐이다. 율곡 이이는 13세에 처음 치른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며 영특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른 자녀들의 학업적·예술적 성취는 모두 사임당이 세상을 뜬 후에야 이루어졌으며 남편 이원수 역시 공부에 뜻을 두지 않은 채 변변찮은 벼슬자리만 전전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임당은 자녀가 스스로 재능을 키워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응원하는 자애롭고 슬기로운 어머니였다.


제각기 지닌 재능을 최대한 살려주고자 했다. 일곱 자식 모두가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모두 자신에게 맞는 행복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응원하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무언지, 진정 행복하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사임당이 자식들에게 물려준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三. 시대를 앞서간 슈퍼 워킹맘, 늘 꿈꾸던 엄마
일곱 아이의 엄마라니! 공부는 언제 하고, 그림은 언제 그린 거야?

 

1504년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1551년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신사임당은 아들딸 합쳐 슬하에 자그마치 일곱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19세에 혼인하여 49세에 세상을 뜨기까지 3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 기간 동안 20세에 맏아들 선을 낳고 25세에 큰딸 매창을, 그리고 둘째 아들 번과 둘째 딸, 32세에 아들 율곡을 낳고 그 뒤로 셋째 딸을 낳은 후 1542년 38세의 나이로 막내아들 우를 낳는다. 무려 18년간 출산과 육아를 이어온 것이다. 

 

물론 요즘처럼 한둘을 낳아 기르는 것과 달리 그 시절에는 자식을 여럿 낳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지만 그 와중에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까지 담당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대단한 열정가이자 슈퍼워킹맘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일을 돌보는 와중에도 저녁이면 호롱불 밑에 단정히 앉아 책을 펼쳤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적 허기를 채워나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늘 공부하고 꿈꾸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식들에게도 귀감이 됐을 것이다.

 

四. 진취적 삶을 살아냈던 ‘쎈 언니’
그저 단순한 ‘현모양처’이길 거부하였다

 

바야흐로 8년 전,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신사임당을 선정하자는 이야기가 오갈 때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반발한 적이 있다. 신사임당이 가부장적 가치관에 기초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전형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상당 부분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오히려 신사임당은 필요할 때 꼿꼿이 제 목소리를 낸 시대를 앞서간 ‘쎈 언니’였다. 

 

학업을 게을리 하는 남편에게 사내가 입신하지 못하고 한 번 선 결심이 이렇게 물러서야 어찌 하느냐며 글공부에 매진하겠다는 약속을 깨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심지어 유언을 남길 때 남편 이원수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당찬 여인이었다. 이렇듯 뚜렷한 자기주관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에 진취적인 여성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 이미지로 굳어진 이유


사임당이 학식 높은 학자로서, 또 예술가가 아닌 현모양처 이미지로 굳어진 것은 조선 성리학파의 종주 송시열로부터 비롯
된다. 그는 성리학의 대가이자 스승이었던 율곡 이이를 띄우기 위해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천재 예술인’이 아닌 ‘이이의 어머니’로 부각시키려 애썼다. 이런 ‘현모양처’ 이미지는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10월 유신을 정당화할 정신교육 소재를 찾던 1970년대 중반, 시대의 영웅 이순신과 짝을 이루는 ‘민족의 어머니’로 신사임당을 동원했던 것.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사임당을 다양한 각도로 재조명하는 연구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사임당: 현모양처 신화를 벗기고 다시 읽는 16세기 조선 소녀 이야기>(인문서원),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다산기획), <사임당이 난설헌에게>(리드리드출판)같은 책이 연일 출간되며 인기를 끄는 등 신사임당을 새로이 평가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五. 조선 최고의 여류 화가 사임당
생명에 대한 애정, 삶과 철학이 묻어 있는 사임당의 작품들

 

우리에게 익숙한 신사임당의 모습은 초상화 속 근엄하고 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에 앞서 사임당은 가슴에 열정을 지닌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시와 글에 능한 예술가였다. 그녀는 40여 점의 수묵화와 채색화를 남기며 안견, 정선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는 예술가로서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사임당의 그림을 본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들은 “풀벌레는 살아서 펄펄 뛰는 것 같고, 오이와 수박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사임당이 남긴 그림은 풀과 풀벌레, 산과 물, 포도, 대나무, 매화 등 자연물, 그리고 몇 점의 산수화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초충도는 여덟 폭의 병풍에 그린 그림으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박, 오이, 가지, 원추리 등 식물과 나비, 메뚜기, 벌, 여치, 방아깨비 등 벌레를 담고 있다. 

 

이 그림들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사임당이 얼마나 깊은 애정을 담아 생명들을 그려냈는지 알 수 있다. 현대의 전문가들은 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리는 데 있어 자연의 본성을 파악하고 이에 맞춰 충실하게 묘사하였다고 평한다. 대상의 묘사도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내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특히 초충도에는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눈길로 관찰하였는데 이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눈이 깊었음을 뜻한다. 그녀는 풀 한 포기, 기어 다니는 벌레, 날아다니는 동물이 한 공간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사람이 사는 모습 또한 비슷할 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초충도 8폭에 담긴 신사임당의 인생관은 모든 생명체와 만물에 대한 존중과 평등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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