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숨겨둔 마지막 얼굴, 만리동 찾았다.

 

 

서울역은 통과 역으로 건설됐다.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다른 곳으로 향하기에 사람들은 서울역 일대를 동과 서로 나누어 불렀다. 서울역 앞쪽 광장은 동쪽, 서울역 뒤편의 만리동은 서쪽. 서울역 앞뜰이 수십 년간 화려한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만리동을 포함한 서부역 일대는 거의 변모하지 않았다. 1974년, 서울역 고가도로를 완공하던 당시의 건축적 콘텍스트가 대부분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만리동을 에워싸고 있던 서울역 고가도로는 곧 공원으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 고가도로 위는 보행로로 조성하고 고가 아래쪽은 만리동 광장이라는 공원으로 재탄생시켜 오는 4월경, 개방한다. 가려진 동네 만리동에도 새로운 기운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오랜 시간 옛 사진처럼 잠자던 만리동은 지금 고유의 색채에 애정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새 시대를 맞고 있다.

 

베리 키친

베리 키친

1. 베리 키친문을 여는 순간, 1백여 년 된 공간이 자아내는 분위기, 그에 어울리는 음악, 공기와 빛의 질감이 온몸의 감각을 자극한다. 거칠거칠한 매력의 만리동 길가로부터 잠시 단절된 기분이 든다. 이곳은 시공이 멈춰 있던 만리동에 불어든 첫 바람, 베리 키친이다. 

 

2년 전 봄, 디자이너 오준식이 이 동네에 자신의 집을 마련하면서 탄생했다. 당시 이름은 베리 스트릿 키친. 낯선 땅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이곳이 금세 만리동에 스며든 데는 지은 지 1백여 년 된, 이 자리에 서서 긴 세월의 역풍을 온몸으로 받아낸 건물 덕이 컸다. 잿빛으로 변한 돌벽, 창문에 달린 녹슨 쇠창살에서는 흘러간 시간이 고스란히 보인다. 

 

건물은 베리 키친이 되기 전, 어느 출판사의 창고, 우체국 그리고 ‘전치병원’이라는 병원이기도 했다. 벽과 천장을 다 뜯으니 불에 탄 흔적이며 페인트가 벗겨진 속살이 드러났다. 베리 키친은 그걸 그대로 썼다. 이 희귀한 부엌은 아주 캐주얼하게 시작했다. 주제는 한식이었다. 한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한국의 음식 문화 중 가장 날것에 해당하는 길거리 음식을 매개로 선택했다. 힘이 바짝 들어간 식탁이 아닌 누구나 모여 즐겁게 한 끼 나눌 수 있는 식탁을 꿈꿨다. 베리 키친은 세계 주요 도시의 길거리 음식과 한국의 길거리 음식을 함께 선보였다. 식재료는 품질 좋은 것으로 엄선해 썼다. 짭조름한 대만식 삼겹살찜과 화이트 와인에 장시간 조리한 김치찜 등 다양한 국적의 소박한 요리들을 식탁에 올렸다. 

 

베리 키친은 자신들이 발견한 은밀한 동네, 만리동에서 한식을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행보를 이어왔다. 최근에는 ‘베리 라이스’라는 한식 브랜드를 추가로 준비하고 있다. 조금 더 한식에 집중한 프로젝트다. 그 첫걸음은 밥과 쌀에 관한 고찰이다. 국내 여러 산지에서 나는 다양한 품종의 쌀을 디자인한다. 이를 시작으로 캐주얼한 한 그릇 음식을 점심 식사로 낼 예정이다.

 

리마크 프레스

리마크 프레스

2. 리마크 프레스리마크 프레스는 삶을 디자인하는 회사다. 이재준 소장과 6명의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대고 많은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골몰한다. 사람들이 집과 동네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끔 공간과 장소를 기획하거나 어떤 동네의 숨은 가치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지난해, 리마크 프레스는 서울역 고가도로 프로젝트 현장 전체가 보이는 만리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이재준 소장은 말했다. “어쩌면 만리동이 연남동과 비슷한 과정을 겪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철길에 제약을 받던 연남동은 숲이 조성된 후 사람들이 몰리면서 기존 거주민이 밀려나고 있죠. 만리동이 이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동네의 가치를 지키며 문화를 만들어나가면 그런 흐름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사무실 입구에는 만리동 일대를 직접 그린 지도가 한 장 붙어 있다. 거기에 빨간색 네모가 여덟 개 남짓. “만리동에 애정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만리동의 변화를 계속 기록하고 있어요.” 이 기록은 만리다락(萬里多樂)이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에 공유할 예정이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만리동에 애정을 갖게 하는 일. 그 일환으로 최근 같은 건물에 마들렌 가게도 열었다.

 

유월의 마들렌

유월의 마들렌

3. 유월의 마들렌리마크 프레스가 만리동에 만든 마들렌 가게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마들렌에서 영감을 받았다. 소설 속에서 마들렌은 가려진 기억을 수면 위로 떠올리는 과자다. 

 

리마크 프레스는 마들렌이 상징하는 ‘기억’이라는 소재에 집중했다. 존재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는 마들렌은 만리동과 잘 맞물렸다. 리마크 프레스는 이 새로운 가게가 만리동에 활기를 불어넣기를 바랐다. 

 

유월의 마들렌은 매일 아침 정성껏 마들렌을 굽는다. 밀가루 대신 국내산 쌀가루를 사용한다. 색소와 방부제를 넣지 않고 서울우유의 동문성 버터를 사용하는 등 남녀노소 먹기 좋은 마들렌을 위해 좋은 재료를 선별한다. 녹차, 홍차, 커피, 레몬, 복분자 등 아홉가지 맛의 마들렌은 디저트와 식사 대용으로 모두 좋다.

 

 

 

 

 

 

바이어 셀러

바이어 셀러

4. 바이어 셀러바이어 셀러는 만리동의 고즈넉한 옛 장소들 틈에서 새하얗게 빛난다. 곧장 연상되는 것은 화이트 큐브. 발랄한 글씨체의 분홍빛 네온사인 아래로 바닥도 벽도 모두 하얀 공간이 펼쳐진다. 사진가 우상희의 감각으로 탄생한 이곳은 취향을 사고파는 콘셉트 스토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변화무쌍한 공간이다. 해외 문구 회사에서 직접 수입해 판매하는 레트로풍의 샤프펜슬과 베이루트의 LP 등이 놓여 있는 선반에서는 일관된 키워드를 찾기 어렵다. “출장과 여행이 잦은 직업을 가졌어요. 해외에서 사온 물건들이 집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조금씩 가지고 나와 팔아보자고 생각했죠.” 바이어 셀러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하얀 선반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빈티지 제품들을 소개하는 귀뚜라미 디자인의 물건들이 또 다른 결을 드러내며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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