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아의 취준진담

신촌 상권에 꽃 자판기가 등장했다. 오래 보관하기 위해 생화를 말린 ‘드라이플라워’들을 각 줄에 네 개씩 자리 잡은 칸에 넣어뒀다. 빛과 광택이 변하지 않아 반영구적인 보관이 가능한 이 꽃들의 가격은 만 원대 정도. 젊은 연인들이 많이 출몰하는 신촌이니만큼 애인 있는 남성 소비자를 겨냥한 듯하다. 꽃을 사러 가기 수줍은 사람들, 애인이 화가 나 쩔쩔매는 사람들이 상상됐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름다운 꽃과 편리함을 기치로 내건 차가운 기계 조합은 이질적이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판기 안 드라이플라워가 생명이 다한 인간을 미라로 만들어 놓은 모습과 겹쳐지면서 씁쓸해지기도 했다. 꽃 자판기는 소멸의 자연원리에 도전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듯하다.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로 묘사될 때 흔히 꽃으로 비유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아름다움을 어떻게 소비하는 지를 보여준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여성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남성 중심적 사회의 미(美)를 따라 구성된다. 이런 사회 속 여성이 영원히 타자일 수밖에 없듯이, 꽃도 같은 이유로 타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타자의 아름다움이란, 쉽게 가질 수 있고 즉각적인 만족이 미덕이 된다. 

 

주위 연애에서도 쉽게 보인다. ‘내 여자친구는 언제나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던 소설가 남자 친구를 뒀던 친구는 그로 인해 몸매, 얼굴, 성격을 매력적으로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타인의 실수와 추함을 허용하지 못하는 나르시스트인 남자는 여자를 그저 아름다운 존재로 생각할 뿐, 그녀의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 한다.

적절한 채광, 알맞은 습도 속에서 꽃이 핀다. 꽃이 되면 더 구체적인 이름을 얻는다. 플라타너스, 로즈우드…. 이들은 아름답다. 현대 사회에서 아름다움은 소비대상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예술작품처럼 충격을 주지 못하고 예측가능한 소비방식을 따른다. 

 

사는 사람은 졸업식, 기념일에 ‘소중한 사람. 축하해’라는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받는 사람은 수줍은 듯 감탄사를 내뱉거나, 꽃을 콧망울 쪽으로 갖다 대 향을 음미하며 ‘으음’ 정도의 소리를 내는 식이다. 그러나 획일적 소비방식으로 인해 꽃의 개별적 이름과 존재는 희미해져도, 여전히 꽃은 사람 간 감정을 전달했다. 

 

엄마를 위해 처음 꽃을 사던 날, 꽃집 안 낯선 풍경과 사장님이 꽃을 포장해주는 동안 그와 나눈 대화 속에서 엄마에 대한 감정이 고조됐다. 나르시즘적인 현대 사회 속에서 낯섦, 짧지 않은 시간은 꽃을 주고받는 사람 간 감정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이제 아름다움은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됐다. 자판기 속 꽃이 있고, 강남엔 성형광고가 판친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우리가 쉽게 획득하고 나르시즘적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우리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멸시감이 드는 것을 말한다. 

 

갓 성인이 돼 벚꽃구경을 처음 간 날, 나는 벚꽃나무가 흐드러진 것을 보니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서글픈 생각이 들어 사진 하나 못 찍었던 경험이 있다. 아름다움의 예찬은 역설적으로 그 존재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무력함을 느낄 때 이루어진다고 깨달았던 날이다. 이를 받아들이니 비로소 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타자는 쉽고 편리하게 내 것이 될 수 없는 타자성을 지닐 수 밖에. 이렇듯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을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근원은 곧 타자의 구원인 셈이라던 철학자 한병철의 전언처럼 말이다. 우리는 꽃에 대해 좀 더 머뭇거릴 필요가 있으며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자판기 속에서 감정이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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