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의 청춘유감

새해 첫달 상할매가 돌아가셨다. 102살이었다. 상할매는 친(親) 증조할머니를 일컫는다. 우리 시골에선 무엇이라도 사려면 차를 끌고 옆 마을까지 나가야 한다. 난 상할매를 명절에나 겨우 봤다. 머리가 크고부턴 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다. 내게 할매는 ‘우리 집에 100살 넘은 증조할머니가 있다’로 이야기 시작할 때 생각나는 분이었다.

상할매에 대해선 이야기 거리가 많다. 할매는 오래 살려면 이래야 한다는 상식과 정반대의 생활습관을 가지셨다. 고기를 좋아했고 채소는 싫어했다. 담배를 하루 한갑 피웠다. 운동도 질색했다. 그래도 손수 닭을 잡았다. 역정도 팔팔하게 잘 냈다. 그래서 상할매가 언제까지나 건강해서 기네스 기록을 갱신할 줄 알았다.

상할매는 팔순에 장손인 동생을 돌까지 키우셨다. 당시 여섯 살 나는 할매와 자주 부딪혔다. 할매가 보기에 나는 천방지축이었다. 내게 할매는 이해 못할 노인이었다. 아마 그 어른에게 핏대를 세우며 대든 마지막 사람이었을 거다.

그래서일까. 할매에게 난 늘 그 무렵 유치원생이었다. 볼 때마다 다 큰 첫 손녀를 낯설어하며 ‘이게 누여’ 라고 물의셨다. ‘할매, 나. 희석이 딸 영일이요’라고 하면 ‘이래 커버렸냐’라고하셨다. 명절마다 할매 기억 속 나는 여섯 살 철 없는 증손녀로 돌아갔다. 그건 할매가 늙어서가 아니었다. 더이상 내가 할매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아서였다.

할매는 방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종일 방에서 TV만 봤다. 언젠가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증손주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셨다. 무어라 설명했지만 할매를 이해시키진 못했다. 할매는 그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정정했다. 그렇지만 가족 중 누구도 할매의 그런 삶을 그려보진 않았다. 할매는 어른이니까 그 정도 적적함은 당연해보였다.

그렇게 적적하게 상할매가 돌아가셨다. 누구는 할매가 돈이 없어 겨울에 군불 못 땐 것도 아니고, 느지막이 병원 신세진 것도 아니니 호상이란다. 하지만 할매의 오랜 무탈이 할매 삶과 죽음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진 않다. 나는 할매가 100세를 생존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그런 이유들로 행복하게 가신 것이라면 좋겠다. 이웃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소일거리하며 새 것들에 자극받으면서. 건강한 삶을 건강하게 누리는 그런 행복으로. 왠지 그렇지 않은 듯해 남들 호상이라고 웃는 장례식장에서 찔끔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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