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블랙리스트 주도 혐의 구속 위기…설국열차·변호인·다이빙벨 등 고비마다 영화검열 의혹

유신의 아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결국 첫 형사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해마다 문화계서는 영화 검열 의혹이 불거졌었다. 그 한복판에 김 전 실장이 서 있다. 영화를 막으려다 영화처럼 몰락한 형국이다.

18일 오전 1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피의자 소환 15시간 만에 조사를 마치고 특검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출석 때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명단을 근거 삼아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예술인들을 예산지원 중단 등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특검은 같은 날 소환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김 전 실장에 대해 공히 구속영장 청구를 검토하고 있다. 이른바 초원복집사건 때도 법의 맹점을 이용해 절묘하게 빠져나간 김 전 실장은 이번에는 형사처벌 신세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문화계에서는 김 전 실장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해마다 영화 검열 의혹이 불거졌다고 오랫동안 의심해왔다. 김 전 실장은 허태열 전 비서실장 후임으로 2013년 8월 청와대에 입성해 2015년 2월까지 재직했다. 문화계에서 공히 영화에 대한 검열의 사례로 언급하는 사건은 3가지다.

우선 2013년 1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8회 런던한국영화제서 개막작이 바뀐 일이다. 당초 개막작으로 정해졌던 작품은 영화 ‘설국열차’와 ‘관상’이었다. 결국 개막작은 스릴러영화 ‘숨바꼭질’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기자와 인터뷰했던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문화연대 집행위원장)는 “런던한국영화제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밑에서 설국열차가 계급투쟁을 다룬 영화니까 혹시나 대통령이 불편해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한 거다. 그러니 ‘개막작 바꿔’ 이런 걸 너무 쉽게 얘기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번 정부에서 정치·사회면에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 ‘변호인’이 개봉했다. 이듬해인 2014년 초부터 흥행돌풍을 일으킨 변호인은 최종관객 1137만명을 불러 모았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는 NEW다. CJ는 투자에 참여했다.

그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한 문화계 인사는 정권의 문화농단 의혹이 알려질 무렵 기자와의 통화에서 “변호인이 왜 좌파영화인지 모르겠지만 노무현 향수 때문에 정권이 아주 불편해했다고 들었다. 이후 이에 대응하는 이른바 ‘우파영화’를 만들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지난달 CBS 라디오에 나와 “(김 전 실장이) 변호인을 만든 (CJ 같은) 회사를 왜 제재를 안 하느냐. 김 전 실장이 수시로 ‘쯧쯧’ 혀를 차고 굉장히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폭로했다. 특검은 이미 유 전 장관을 만나 증언을 확보해놓은 상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이 김 전 실장의 아킬레스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김 전 실장은 17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직접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에 나선 바 있다.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이미경 CJ 부회장 퇴진압박 의혹 역시 영화 변호인과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막상 변호인의 투자배급사도 아니었던 CJ는 투자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셈이다. CJ는 이후 박정희 정권 시기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을 투자배급했다.

2014년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만든 영화 ‘다이빙벨’도 수난을 겪었다. 2015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다이빙벨은 서병수 부산시장이 상영 철회를 요구하면서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후 다수의 영화인들이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을 보이콧하면서 파행사태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동연 교수는 “왜 서병수 시장이 이렇게까지 다이빙벨에 집착할까. 총대를 멨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치는 않지만, 다이빙벨에 대해 청와대가 격노했을 때 두 사람에게 전언이 갔다고 하더라. 한 사람은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前 문화융성위원장), 다른 한 사람은 서병수 시장이다. 김 이사장은 절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서 시장이 ‘내가 막겠다’ 했다고 전언으로 들었다”고 밝혔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의 몸통으로 지목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18일 새벽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 국정농단 사건 수사 특별검사팀' 사무실에서 소환 조사를 받은 뒤 밖으로 나와 대기하던 차량을 타고 있다. / 사진=뉴스1

앞서 이 교수가 집행위원장으로 재직 중인 문화연대 등 문화예술단체들은 지난해 12월 12일 특검에 김 전 실장과 서 시장 등 9인을 직접 고발했다. 이 교수는 서 시장이 포함된 이유에 대해 ‘청와대 직접 개입설’을 주장한 셈이다. 실제 현직 부산시장이 직접 나서게 할 만큼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권력자는 이 정부에서 대통령과 비서실장 정도뿐이다.

확실치 않았다는 전제를 두고 전개된 이 교수의 폭로는 최근 정황 덕에 사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정국의 스모킹건이 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시네마달 內査(내사)-다이빙벨 관련’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시네마달은 다이빙벨을 투자배급한 국내 대표적인 독립 다큐멘터리 전문배급사다. 이규철 특검보는 17일 “김 전 수석 비망록은 수사과정에서 입수했고 증거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또 17일 SBS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전액을 삭감하라고 지시한 진술을 특검이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다이빙벨 사건이 불거진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예산은 직전해보다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

김영한 비망록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수석비서관들에게 “문화예술계 좌파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해야” 같은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타난다. 유신 선포(1972년) 이후 최연소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장이 된 김 전 실장이 여전히 ‘공안몰이​ 하듯이 불편한 영화들을 솎아내려 했다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 전 실장이 중앙정보부에 재직 중이던 1974년부터 1979년 사이는 영화의 최종상영분이 무려 30분이나 검열로 잘려나가고(‘바보들의 행진’) 유명가수의 인기곡들(‘왜 불러’, ‘아침이슬’,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등)이 권력을 조롱하거나 북한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설정됐던 시대다. 김 전 실장이 여전히 유신의 아들로 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참여예술이나 문화운동과는 거리를 둬왔던 한 온건파 문화계 유력인사는 최근 기자와 만나 “(몇 개월 전) 블랙리스트 문제를 공론화하니 일부 여당 정치인들이 블랙리스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따지더라. 그때도 그들에게 ‘블랙리스트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답했는데 (확신을 갖고) 그리 답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규철 특검보는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비서실장이 아니라 대통령 지시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정황과 물증에 대해 계속 확인할 예정”이라며 “피해사례는 파악하고 있다. 수사마무리 시점에 밝히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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