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블랙리스트' 김기춘‧조윤선 정조준…서병수 시장도 고발대상 올라 국제영화제까지 불똥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수사에 나선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관들이 26일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실 등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품이 담긴 상자를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 사진=뉴스1

박근혜 정부의 문화농단이 사정당국 칼날 위에 놓였다. 특검은 그간 검찰의 핵심 수사선상에서 비켜나 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정면 겨냥하기 시작했다. 유진룡 전 장관도 때마침 언론에 나와 관련 사실을 폭로했다. 유 전 장관이 말한 내용들은 그간 기자가 접촉했던 문화계 인사들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이 와중에 영화진흥위원회도 부산지검에 고발당하면서 문화농단을 겨냥한 사정당국의 활동공간은 더 넓어지는 모양새다.

26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전격적으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압수수색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들이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핵심 사안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이다.

앞서 10월에도 문체부는 검찰 특별수사본부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한 바 있다. 이번에는 결이 다르다. 10월 압수수색은 문화콘텐츠산업실과 체육정책실에 집중됐었다.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운영 관련 문서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다. 

 

이번에는 예술정책관실이 눈길을 끈다.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장관, 예술정책관실을 모두 관통하는 키워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다.

앞서 12일 문화연대, 서울연극협회 등 문화예술관련 12개 단체는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장관, 모철민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김소영 청와대 문화체육담당 비서관,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등 9명을 특검에 고발했다.

27일 오전 특검에 소환된 정관주 전 차관은 조윤선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 재직 시 국민소통비서관으로 일했다. 당시 정무수석실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달 9일 서울문화재단 토론회에 참석한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블랙리스트 몸통은 조윤선”이라고 고발했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도 26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나와 “퇴임 직전 블랙리스트를 직접 봤다”며 “리스트 이전에 구두로, 수시로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라고 하면서 모철민 수석이나 김소영 비서관을 통해 문체부로 전달됐다”고 폭로했다. 유 전 장관은 이 문제로 박근혜 대통령과 2차례 면담해 직접 항의했다고도 밝혔다.

이는 그간 기자가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접촉해온 인사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이 오른 한 문화계 인사는 기자에게 “유진룡 장관 재직 때는 문화행정이 리버럴(자유주의적)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중간에서 조금 왼쪽 혹은 이전 정부와 연결된 현장 문화예술단체나 인물들에 대한 예산 지원이 자꾸 잘려나갔다”고 증언했었다.

특검은 이미 유 전 장관을 제3의 장소에서 만나 관련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특검이 문화관련 단체의 고발과 전직 문체부 장관의 폭로에 적극 응하는 모양새로 정권 핵심부를 겨냥하는 모습이다.

특검 고발 이튿날 기자와 만난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을 중심으로 공안정치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과정에서 문화예술인들 중 지원해줄 사람과 지원하지 않을 사람을 구분하는 블랙리스트 작업이 생겨났던 것 같다. 문체부 수준을 넘어 청와대 차원에서 검토됐다”며 김 전 실장을 정면겨냥했다.
 

정관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27일 오전 서울 대치동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 국정농단 사건 수사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소환되고 있다. 정 전 차관은 지난 2014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실 국민소통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77),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50)과 함께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사진=뉴스1

특검이 26일 저녁 늦게 전남 나주혁신도시에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압수수색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문예위는 이번 국정농단 정국의 한가운데와는 거리를 둔 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선상에도 오른 적이 없다.

하지만 문예위는 문화예술계 검열의 선봉 역할을 해왔던 기관으로 꼽힌다. 이동연 위원장은 박명진 문예위원장에 대해 “부끄럽고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검열이 벌어진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라며 강하게 비판했었다.

김미도 연극평론가도 앞선 토론회 자리서 “(그간) 교묘하고 교활하게 검열이 이뤄져왔다. (문예위가)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지원금 관련) 심의위원들로 채우고 있다”고 폭로했다. 특검이 문예위까지 직접 겨냥하면서 블랙리스트와 연관된 당사자들이 모두 수사대상에 오르게 됐다.

이게 끝이 아니다. 문화연대 등의 고발 명단에 서병수 부산시장 이름도 껴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서 시장은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다이빙벨에 대해 상영 철회를 요구하면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세월호 참사를 다루고 있다. 이후 영화인들이 부산국제영화제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파행사태에 이르게 됐다.

이동연 위원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왜 서 시장이 이렇게까지 다이빙벨에 집착할까. 총대를 멨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청와대 지시를 받고 광역자치단체장이 다이빙벨을 막았다면 그건 고발감”이라며 정권 개입설에 불을 지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보이콧한 연상호 감독(‘부산행’ 연출)도 서울문화재단 주최 토론회에서 “(다이빙벨 상영 중단압력이) 보복이라는 게 너무 눈에 보인다”고 밝혔다.

만일 특검이 이 부분까지 수사대상에 넣으면 블랙리스트 파문은 세계적 위상을 지닌 국제영화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특히 연결고리에 세월호 참사가 자리했다는 점도 휘발성이 강한 사안이다. 유진룡 전 장관은 앞선 라디오 인터뷰에서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가 나고 나서 슬슬 구두로 시비를 걸기 시작해 그해 6월에 들어서는 정식으로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가 문서로 오게 됐다”고 폭로했다

그간 기자가 만나온 복수의 문화계 인사들도 문화계 검열의 결정적인 전환국면이 세월호 참사였다고 증언했었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앞선 문화계 인사는 “세월호 터지면서 문화에서 관련 작품들이 쭉 나오다보니 심기를 건드렸다”고 밝혔다. 결국 서병수 시장의 움직임 역시 세월호 참사 직후 본격화 된 정권 차원의 검열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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