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 꿈이 없었다. 그러다 서울 소재 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회계를 배우면 취직할 수 있다고 알았지만 흥미가 없었다. 제대 후 취직 대신 창업을 꿈꿨다. 자본금은 단 돈 100만원, 사업은 가시밭길이었다. 이 진부한 창업 준비기는 박경기(27) 글리코스 대표의 이야기다.
박 대표 창업기에 기적은 없다. 놀랄만한 특별함도 없다. 그러나 그가 털어놓는 덤덤한 창업기에 공백이 없다. 그의 20대 시절은 빠르지 않지만 방향성은 확실한 경운기 같다. 박 대표는 “수백 가지 성공담을 듣는 시간에 무언가라도 팔아보고 시장반응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럽 브랜드가 독점하던 고체 입욕제 시장에 도전해, 1년 만에 기업가치 10억원을 이룬 박경기 대표를 7일 서울 동작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 “떡 같은 게 왜 2만원이나 해?”
박 대표가 처음 판매에 도전한 건 3년 전이다. 마스크 팩을 유통하고 국내외 고객에게 팔았다. 좀 비싸더라도 품질 좋은 팩을 하이엔드 고객에게 판다는 게 처음 포부였다. 하지만 그가 틈새시장이라고 여겼던 이 시장마저 유통 공룡들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규모의 경제 한계를 느끼던 박 대표 눈에 들어온 건 고체 입욕제다.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팩 판매가 점점 축소되던 어느 날, 러쉬(Lush)라는 오프라인 매장을 발견했다. 브랜드 이름이 낯설어 들어가 봤다. 이상한 떡 같은 물체를 파는데 가격이 2만원이었다. 고체 입욕제라는데 손바닥만한 게 꽤 비쌌다. 그런데도 매장이 사람들로 붐비더라.”
박 대표는 바로 국내 고체 입욕제 시장조사에 나섰다.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건 영국계 브랜드인 러쉬였다. 국내 입점한 점포수만 68개였다. 경쟁 브랜드는 찾기 어려웠다. 사실상 독과점 상태였다. 그러나 앞서 실패를 맛봤던 마스크 팩 시장보다 꽤 큰 ‘틈새’가 보였다. 가격만 낮춘다면 충분히 승부를 볼만한 시장이라는 분석이 섰다.
◇ 가격보다 중요한 건 소비자의 '즐거움'
박 대표는 해외브랜드가 사용한다는 고체 입욕제 제조법을 공부했다. 재료 배합법을 개발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채용을 통해 문제를 풀었다. 프랑스에서 조향(調香)을 공부한 연구원을 고용한 뒤, 고유의 향을 지닌 고체 입욕제 생산을 시작했다. 제조와 판매를 같이 하니, 유럽에서 수입하는 타사 제품보다 절반 이상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해내는데 성공했다. 글리코스 고체 입욕제 판매가격은 평균 7000원 내외다.
그러나 가격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소비자가 가격 대비 품질을 체감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박 대표는 입욕제를 구매하는 고객 성향을 분석했다. 색과 거품이 있는 목욕을 즐기는 소비자들이 원한 건 결국 즐거움이라는 답을 냈다.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회사는 후발업체에겐 일종의 협력사다. 대형회사 제품을 쓰다보면 언젠가 비슷한 제품의 더 낮은 가격대 제품을 한 번 찾아보기 마련이다. 그게 우리에게 기회가 된다. ‘디테일(세밀함)’이 그때 중요해 지는데, 우린 온라인 업체에서 입욕제를 찾는 이들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들이 즐거움을 찾는다면, 한번 그 즐거움을 극대화해보자 생각이 들었다.”
박 대표는 온라인 주문이 접수되면 “고객님께 폭탄이 배달 됐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낸다. 고체 입욕제 브랜드명이 ‘폭탄 만드는 남자’라는 점에서 착용한 가벼운 장난인데, 소비자들이 이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홍보효과를 누렸다. 이 밖에도 박 대표는 제품에 자필로 쓴 간단한 감사인사나, 안개꽃 같은 작은 선물을 제품에 동봉한다.
◇ 창업교육 100시간, 1번의 판매 경험만 못해
사업은 순항 중이다. 창업초기 하루에 제품 1개 팔기도 어려웠던 시절은 이제 옛일이 됐다. 지난해 10월 법인설립 후 1년 만에 매출이 40배 늘었다. 최근에는 한 투자전문회사에서 3000만원 상당 현물투자를 받았다. 내년에는 추가 투자가 예정됐다. 주식회사 글리코스 기업가치는 현재 10억원 정도로 평가받는다. 자본금 100만원으로 일궈낸 성과다.
작은 성공에 도취될 법도 하지만 박 대표는 아직 쉴 여유가 없다고 웃어보였다. 목표는 화장품 브랜드 출시다. 입욕제 9개로 구성된 판매 품목을 내년 중 확장시킬 계획이다. 고체 입욕제에서 얻은 제조 노하우를 바탕으로 비누와 바디워시 제품 생산을 고려중이다. 매일 향을 맡으며 연구하다 보니, 박 대표는 이제 웬만한 향기는 맡지 못한다.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기회를 놓칠까 항상 시간에 쫓겨 살게 된다. 그래도 행복하다. 힘들 게 만든 제품이 팔려나갈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 아직도 오렌지 타이거라는 입욕제를 처음으로 팔던 날을 잊지 못한다. 후속으로 낼 입욕제 향기를 매일 연구하다보니 나에게 향기란 ‘없을 무’가 돼버렸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처럼 창업 지원 환경이 잘 돼 있는 국가가 없다고 했다.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주는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그러나 창업은 결국 책상 아닌 현장에서 익혀야 한다는 게 박 대표 생각이다. 그는 준비에 들이는 시간이 성공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와 접점을 빨리 찾지 못하면 수십 시간 창업교육도 무의미하다. 창업하고자 한다면 뭘 하나라도 팔아봐야 한다. 1000~2000원 물건이라도 좋다. 팔린다면 그 돈이 또 다른 사업의 종자돈이 된다. 안 팔린다면 그 제품은 시장성이 없는 거다. 중요한 것은 시장반응이다. ‘봐라, 사람들이 산다!’라는 기쁨이 창업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