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경유착, 중국 사드, 미국 보호무역…정몽구, 대통령에게 "노사 문제로 경영환경 불확실"

 

현대자동차그룹이 국내·외 정치(政治)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국에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로 반한 감정이 싹트고 있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당선으로 높은 관세장벽이 수출길 장애물로 등장했다.

현대차는 4분기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지만 이마저도 정몽구 회장이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리며 어그러졌다. 경쟁사들의 신차 공세에 내수 판매량까지 게걸음 하는 상황에서 정치 리스크까지 커져 현대차 청사진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회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특별위원회(국조특위)는 지난 21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포함한 대그룹 총수 9명을 다음달 5일부터 시작되는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정 회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만남 당시 오고 간 대화내용이 국조특위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지난해 7월과 올해 2월 박 대통령과 독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조특위에 참여하는 여·야 국회의원은 정 회장이 민원성 현안을 청와대에 전했는지를 집중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안 전 수석이 지난해 7월 박근혜 대통령과 7개 그룹 총수들과 독대하기 직전에 ‘각 그룹의 당면 현안을 정리한 자료’를 받아 자필 메모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이 확보한 메모에는 정몽구 회장이 박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노사문제로 경영환경이 불확실하다"고 말한 내용이 적혀있다.

여·야 의원들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론을 더 격화시키려고 시도할 태세다. 박 대통령이 하야 요구에 귀를 닫고 있는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 등 재벌들을 ‘제물’삼아 대통령의 치부를 들춰내겠다는 셈법이다.

 

재계는 고령인 정 회장(78)이 의원들의 거센 질의공세를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라며, 현대차가 이를 대비한 ‘리허설’을 실시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대해 23일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현대차가 의원 질문을 예상하고 모범답안을 외워온다면, 우리도 현대차 ‘뻔한’ 답변에 대비하고 있다. 시국이 엄중한 만큼 쉽사리 넘어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현대차가 경제위기를 이유로 (정 회장의 국조특위 출석을) 어려워한다고 하자 “검찰에서 피의자로 현대차를 올리진 않았지만 엄연히 의혹을 안고 있는 기업이다. 잘못이 없다면 왜 국조특위를 피하나”라고 반문했다.

정경유착 스캔들은 기업에겐 치명적이다. 소비자 신뢰도를 단 번에 잃을 수 있고, 최악의 경우 형사고발까지 당할 수도 있다. 다만 현대차는 검찰로부터 비선실세 외압에 의한 피해자라는 면죄부를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현대차는 최순실 스캔들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올해 경영상황이 창사 이래 가장 좋지 못한 탓이다.

현대차는 올해 노조 장기 파업에 시달려야 했다. 노조가 올해 진행한 파업과 주말 특근 거부 등으로 현대차는 3조1000억원(14만2000여대)에 달하는 생산차질을 빚었다. 기아차도 7만대의 생산 차질로 1조원 넘는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한국GM 임팔라·말리부, 르노삼성차 SM6 등이 인기를 끌며 현대차 내수판매의 주축인 세단부문이 타격을 받았다. 결국 2009년까지 80%에 육박하던 현대·기아차 내수점유율은 지난달 59%까지 떨어졌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10월 18일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시(滄州市)에서 연산 30만대 규모의 창저우공장 준공식 행사를 개최했다. 현대차는 이로써 중국현지에 4개 생산기지를 갖게 됐다. / 사진=현대차그룹

 

해외 판매도 내리막이다. 현대차는 올해 3분기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전년 동기 대비 1.7% 감소한 347만7911대를 판매했다. 기아차 3분기 누적 글로벌 시장 판매량은 214만893대로 지난해 보다 2.1% 줄었다. 4분기(10~12월) 첫 달도 해외 판매 부진이 이어졌다. 현대차는 지난달 해외에서 전년 동기보다 6.6% 감소한 36만4313대를 판매했다. 같은 기간 기아차 해외 판매량은 총 21만 9209대로 전년 대비 1.4% 줄었다.

해외 정치 상황도 현대차에 부정적이다. 세계 자동차산업 중심지로 떠오른 중국에선 반한감정이 싹트고 있다. 도화선은 국방문제다. 한국 정부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소식에 중국 정부가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이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자, 중국 내에서는 한·일 자동차 불매운동 조짐까지 일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생산 공장 4개를 가동 중인 현대차로선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보호무역 강화가 예고되고 있다. 20일 미국 CNN 등에 따르면 트럼프 정권인수위원회가 준비한 ‘무역 200일 계획’ 문건에는 미국 무역대표부가 멕시코에 NAFTA 재협상을 요구토록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트럼프의 이 같은 계획은 기아차에겐 비보다. 기아차는 연산 40만대 규모인 멕시코 공장을 대미 수출 요충지도 삼겠다고 공언해 왔다.

NAFTA 관세혜택이 사라지거나 대폭 줄어들 경우 이에 대한 대안마련이 불가피해진다. 권순우 SK증권 연구원은 “트럼프가 멕시코 관세 35%를 제창하고 있다. 멕시코 공장으로 인한 기아차 우려가 큰 상황”이라며 “멕시코에 진출한 기아차 동반진출업체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대차그룹 내부에선 이 같은 상황을 ‘비상사태’로 바라보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부터 계열사 이사대우 이상 직급 1000여명이 급여 10%를 자진해서 삭감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 임원들이 급여 삭감에 나선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1월 이후 7년여 만이다.

 

그러나 국내외 정치 변수가 동시에 요동치는 상황에서, 현대차가 위기를 타파할 묘수를 찾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전반기에는 개별소비세 인하 연장 등 자동차 시장에 활력을 심기 위한 정책들이 나왔지만 후반기에는 각종 악재가 누적되면서 좋지 않은 전조가 많아지고 있다”며 “자동차 산업은 차제 자체도 중요하지만 관련 인프라와 법적 제도적 기반에 영향을 받는다. 정치 스캔들에 휘말리거나 세금 정책 하나라도 변해버리면 (신차개발 및 마케팅 등)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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