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경영권승계 돕느라 국민 노후자금 훼손 의혹…선관의무 다하도록 견제 장치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국민연금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차원에서 지난해 7월 단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국민연금이 거든 것이 삼성과 최순실씨와의 뒷거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추진 당시부터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지나치게 불리하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합병에 반대한 것은 미국계 헷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만이 아니었다. 세계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 국내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도 합병에 반대하고 나섰다. 대신경제연구소 등 합병 찬성 의견도 일부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무산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난해 7월 17일 주총에서 결국 합병안이 통과됐다.​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로 11.2%의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이 찬성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민연금 덕분에 찬성률 69.5%로 합병안 통과에 필요한 참석주주의 3분의 2 선인 66.7%를 간신히 넘긴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는 그룹 핵심계열사인 삼성전자 주식 8조원 어치를 거저 인수한 셈이 됐고 그만큼 그룹 지배력도 커지게 됐다.


국민연금이 찬성 의결권을 행사한 것을 놓고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는 말이 무성했다. 합병 주총을 10여일 앞두고 국민연금의 홍완선 당시 기금운용본부장이 이재용 부회장을 은밀하게 만난 사실이 드러나 더 의혹을 샀다. 홍씨는 지난해 10월 15일 국민연금공단에 대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 부회장을 만난 이유에 대해 "합병 후 삼성물산의 사업 계획이나 미래가치 부분을 평가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렇게 떳떳한 만남이었다면 공개적으로 못할 이유가 없는데 굳이 자신의 보스인 최광 당시 국민연금 이사장도 모르게 쉬쉬하며 만나 두 사람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 이유가 뭔지 도무지 납득이 안된다.

이제 검찰마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삼성의 적극적인 지원 경위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의 관련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결 고리를 통해 국민연금에도 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부당한 힘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라면 수사기관이 관련자들을 샅샅이 밝혀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 끝낼 일이 결코 아니다.

지난 5월 서울고등법원은 일부 주주들이 “과거 삼성물산이 합병때 제시한 주식 매수청구 가격이 너무 낮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삼성 측이 제시한 가격보다 16% 가량 높은 가격이 적정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어 6월에는 시민단체들이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의 합병 반대 권고가 있었음에도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에 불리한 합병 비율을 받아들여 손실을 초래했다며 홍 전 본부장을 배임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울고법 판결을 근거로 이 부회장 등 삼성 오너 일가가 3718억원의 부당이득을 올린 반면 국민연금은 580억원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이런 논란을 보면서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의 부재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가 투자대상 기업을 잘 감시하고 의결권 행사를 통해 총수 등의 일탈행위를 견제함으로써 기금 위탁자, 즉 국민과 투자자들의 이익을 지켜내라는 행동준칙이다. 한마디로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선관의무, Fiduciary Duty)를 다해 ‘고객의 돈을 내 돈처럼 다루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영국, 독일, 네덜란드, 호주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도 일본과 말레이시아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4년 신제윤 당시 금융위원장이 도입 방침을 밝힌후 지난해 12월에는 공청회까지 열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진척이 없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일찌감치 도입됐다면 삼성물산 합병때 국민연금이 다르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와중에 재벌이 제도 도입을 막아서고 있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이를 확인해주듯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7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반대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돈을 불리지는 못할 망정 재벌의 배를 불리기위해 뻔히 손실이 날 짓을 했다면 문제가 이만저만 심각한게 아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국민연금 재정이 축나다 보면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할 연금 보험료 인상이나 노후 연금 수령액을 줄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국민 미래의 삶을 암울하게 하는 국민연금의 무책임한 행태가 있다면 반드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야말로 그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재벌과의 유착 의혹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더 이상 뜸을 들일 이유가 없다. 국민연금도 땅에 떨어진 신뢰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적극 나서야할 판이다. 재벌들도 이제 기형적인 지배구조를 청산하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에 적극 나섬으로써 작금의 사태로 초래된 국민의 깊은 불신을 씻어내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이 뻔히 보이고 그 문제를 막을 방법도 명확한데 마냥 두 손 놓고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정부가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는 일을 계속 미룬다면 ​이런 파행적인 구조속에서 이익을 보는 일부 특권집단을 배려하려는 불순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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