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남긴 원료 중개상, SK케미칼과 긴밀한 관계 정황…살균제 흡입독성 인지 가능성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동안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한 가습기살균제의 원료 물질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를 생산한 SK케미칼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해왔다.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 원료 및 완제품을 개발·판매한 SK케미칼·애경·이마트 등 3개사의 전·현직 임원 20명을 수사해 달라며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기도 했다. 지금도 국회와 법원 앞에서는 SK케미칼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SK케미칼은 검찰 수사의 칼끝에서 빗겨나 있다. SK케미칼 측은 검찰 조사 시작 단계에서부터 자신들이 개발한 물질이 옥시의 가습기살균제 생산 용도로 판매되는지 몰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SK케미칼이 자신들이 생산한 PHMG가 가습기살균제 성분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인지했는지 여부에 따라 SK케미칼의 책임문제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 공판과정에서 SK케미칼이 PHMG가 가습기살균제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SK케미칼이 원료를 판매했던 중개업체인 CDI의 주요 인사들이 SK케미칼 출신인데다,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공론화되기 이전부터 친분 관계를 유지해 왔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일부 드러났다.

◇ 2000년 5월 작성된 메모 “SK-흡입독성 불가능”


가습기살균제 원료 중개업체 CDI는 SK케미칼 직원 이아무개씨가 10년전인 2006년 설립한 회사다. CDI는 물리화학 및 생물학 연구와 함께 식품첨가물, 화학약품 등을 제조‧판매 해왔다. CDI는 옥시와 SK케미칼 두 기업과 거래하며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CDI가 양사를 오가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전달했는지 여부가 옥시의 고의성과 SK케미칼의 책임 소재를 밝혀줄 열쇠로 떠오르고 있다.

기자는 지난 9월29일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CDI 공장을 직접 찾았다. CDI는 주차장 겸 공터를 앞에 두고 2층짜리 낮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회사 한 켠에는 화학용품을 취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용기들이 쌓여 있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건에 연루돼 CDI에 대한 검찰 조사와 재판, 청문회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업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 보였다. 


예상과 달리 회사 경비는 심하지 않았지만 직원을 통하지 않고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기자는 인터폰을 받고 나온 직원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현재 이 대표와 임원인 최 아무개 이사의 거취를 묻는 기자에게 CDI측 직원은 “대표는 자리에 없고, 최 이사는 현재 해외 출장 중”이라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표가 재판과 청문회에서 진술한 내용이 전부”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지난 9월29일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CDI 공장 전경.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건에 연루돼 CDI에 대한 검찰 조사와 재판, 청문회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업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 보였다. / 사진=시사저널e

 


CDI가 함구하고 있고 SK케미칼이 책임을 부인하는 가운데, 지난 8월22일 공판에서 중요한 메모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원료 중개업체 CDI의 이 대표가 옥시와 SK케미칼 등 주요 거래처 직원들을 직접 만나 작성한 거래처 메모장이었다. 


옥시와 SK케미칼 사이에서 PHMG 원료를 공급한 CDI의 이 대표가 피고인 겸 증인신분으로 증언대에 섰다. 이 대표는 옥시 측 최아무개 연구원과 SK케미칼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또 가습기 살균제 원료 생산 업체이면서도 재판에서 비껴나 있는 SK케미칼의 책임 여부를 가려줄 인물이기도 하다.

이 대표가 작성한 메모에는 ‘2000년 5월23일 스캔비1125, 가습기 테스트, (SK-정식 흡입독성 불가능, 간이로 가능)’이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었다. 스캔비1125와 스카이바이오1125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과 SK케미칼이 가습기살균제 원료 물질인 PHMG의 브랜드명으로 사용했다. 이는 PHMG가 가습기에 쓰인다는 것을 몰랐다는 SK케미칼 측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옥시의 최 연구원에게서) 스캔비1125(PHMG)가 가습기 살균제에 쓰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에 따르면 옥시 최 연구원에게 흡입독성 자료 여부와 테스트를 국내에서 할 수 있는지 문의를 받았지만 흡입독성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이에 흡입독성 실험을 할 수 있는 곳에 대해 SK쪽에 전화로 물어 한국화학연구소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을 받아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SK케미칼은 꼭 가습기살균제로 특정하지 않더라도 옥시에서 PHMG 원료를 ‘흡입용도’로 사용할 목적임을 알았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SK케미칼 측이 판매처가 옥시인지, 흡입독성 여부가 왜 필요한지 전혀 몰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 나아가 옥시와 SK케미칼이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유해성을 인지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메모도 나왔다. 2000년 1월17일 ‘가습기 스캔비1125(PHMG) 머리 아프다는 이야기 있음’이라는 메모가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 대표는 “가습기 살균제에 스캔비 1125가 쓰였고 (옥시 최 연구원에게) 머리 아프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의 제품 개발과정에서 소비자 혹은 평가자로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클레임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옥시는 2000년 10월 옥시싹싹가습기당번 제품의 원료를 SK케미칼이 생산한 PHMG로 변경해 출시했다. 출시 약 10개월 전인 2000년 1월경 이 같은 메모가 중개상에서 나왔다는 것은 옥시가 제품 출시 직전 원료의 유해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시도했음을 의미한다.

또 이 과정에서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는 “머리가 아프다” 평가가 있었음에도 추가적인 안전성 검사를 실시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SK케미칼이 전달 받았는지에 대해서 메모를 작성한 이 대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SK케미칼은 “당시 실무자들 간에 정기 미팅이나 보고 체계에 대해 정확히 알기 어렵다”고 밝혔다.

◇ SK케미칼, ‘업무에 참고하라’…옥시에 팩스 보내

옥시 측과 SK케미칼은 CDI라는 원료 중개업체를 가운데 끼고 있었을 뿐 서로 거래처인지 조차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줄곧 모르쇠로 일관해 온 관련자들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연결고리들이 일부 드러났다.

먼저 원료중개상인 CDI 주요 임직원들이 SK케미칼 출신이었다. CDI 이 대표는 1988년 SK케미칼의 전신인 선경인더스트리에 입사해 1996년 8월까지 재직했다. 그는 스카이바이오팀의 마케팅 과장으로 근무하다 퇴직 후 CDI를 세웠다.

이 대표는 검찰 진술에서 “SK케미칼은 친정과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강한 친밀감과 신뢰를 드러냈다. 또 “SK케미칼이 스카이바이오1125(PHMG)를 출시했다는 말을 듣고서 직접 찾아가서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업을 제안했다”고 증언했다. 1998년부터 CDI는 SK케미칼로부터 스카이바이오1125(PHMG)를 공급받아 옥시와 한빛화학에 가습기살균제 원료를 공급해왔다.

CDI의 등기이사이자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최 이사 역시 SK케미칼 스카이바이오팀 과장 등으로 일하다가 2007년 CDI에 입사했다. 최 이사는 CDI의 지분 15%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최 이사는 SK케미칼 스카이바이오팀 재직 당시였던 지난 2002년, 살균제 조성물 및 이를 이용한 살균방법에 대한 SK케미칼의 특허 출원하는 등 살균제품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외에도 CDI의 영업이사 이 아무개 씨는 SK케미칼 스카이바이오팀 과장으로 근무하다 CDI에 입사해 영업을 맡고 있다. 결국 CDI는 SK케미칼 스카이바이오팀의 직원들이 퇴직 후 모여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공판 과정에서는 SK케미칼과 옥시 측이 직접 주고받은 팩스도 증거로 제시됐다. CDI의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최 이사가 SK케미칼에 근무하던 당시 옥시 연구원에게 직접 팩스를 보낸 사실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1997년 7월12일 당시 최 이사는 옥시 측 연구원인 최씨에게 “**아 자료발송하니 업무에 참고하기 바란다. 수고하고”라는 자필 메모가 적힌 팩스를 보냈다. 이는 최 이사는 CDI로 이직하기 10여년 전이다.

최 이사와 옥시 연구원, 그리고 CDI 이 대표는 국내 한 대학의 동문이다. 미생물 전공으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CDI 이 대표는 “재학 중에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고 사회 나와서 일하면서 알게 됐다”고 선을 그었다.

검찰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습기살균제 업체인 옥시의 신현우 전 대표 측 변호인도 이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이 원료의 유해성에 대해 사전에 공유했다는 단초로 보고 있다. 신현우 전 대표의 변호인은 “‘**아’ 라고 표현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관계였다면서 서로 거래처인지도 몰랐다는 증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SK케미칼 측은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 대해 답변을 하기 어렵다”고 즉답을 피했다. 

 

원료중개상인 CDI는 SK케미칼 스카이바이오팀의 직원들이 퇴직 후 모여 운영하는 회사로 드러났다. / 그래픽 = 시사저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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